군에 입대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병역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가 무기한 한국 입국이 금지된 가수 유승준(43)씨의 입국 길이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대법원이 유씨에게 비자발급을 거부한 영사관의 조처가 잘못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상부 지침 따른 무조건적 비자발급 거부는 잘못”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11일 유씨가 주로스앤젤레스 한국총영사관을 상대로 낸 사증(비자) 발급 거부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2002년 법무부 장관에 의해 한국 입국이 금지된 유씨는 2015년 영사관에 비자발급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하자 거부처분 취소 소송을 냈다.
1·2심은 영사관의 유씨 비자발급 거부에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대법원은 영사관 결정에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2015년 당시 비자발급 거부의 근거가 된 2002년 법무부의 입국금지 결정이 외부에 공표되지 않은 내부 지시에 불과해, 국민이나 법원을 구속하는 ‘처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영사관이 다른 고려 없이 2002년 법무부 결정만을 근거로 비자발급을 거부한 것은 주어진 재량권을 행사하지 않은 위법행위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비자발급 여부를 판단할 때 “상급기관 지시를 따를 게 아니라 헌법이나 법률, 비례·평등 등 ‘법의 일반원칙’ 등에 적합한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출입국관리법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질러 금고형을 선고받아도 추방 뒤 5년 동안만 입국을 금지하고, 옛 재외동포법은 ‘병역 목적으로 국적을 상실해도 38살이 되면 안전·질서 등 한국 이익을 해칠 특별한 우려가 없으면 비자발급을 제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거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유씨의 병역의무 위반과 이에 대한 제재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해, 국민감정에 바탕을 둔 과도한 제재가 이뤄졌음을 시사했다.
■ 병역의무 피하려 미국 시민권…정부 “입국 불허” 유씨 쪽은 이날 입장문을 내어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그동안 유승준과 가족들에게 가슴속 깊이 맺혔던 한을 풀 기회를 갖게 됐다”고 밝혔다.
미국 영주권자였던 유씨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가위’ ‘나나나’ ‘열정’ 등의 히트곡을 낸 인기 가수였다. 유씨는 선행과 봉사활동이 언론에 소개되며 ‘아름다운 청년’으로 불렸고, 2001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해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25살이던 2001년 11월 사회복무요원 소집통지를 받은 유씨는 이듬해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약속을 어긴 채 미국인이 된 것이다. 그에 대한 환호는 국민적 공분으로 돌아섰고, 곧 법무부에 의해 입국이 금지됐다.
10여년 동안 입국 시도를 하지 않던 유씨는 2015년 만 38살이 돼 병역의무가 해제되자 그해 8월 재외동포 비자 발급을 신청했고, 영사관이 이를 불허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 입국 길 열릴 가능성 커졌지만…장담은 못 해 이번 대법원의 판단으로 유씨의 한국 입국 길이 넓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을 거쳐야 하고, 유씨가 최종 승소하더라도 영사관의 비자발급 거부처분이 취소될 뿐이다. 유씨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영사관에서 다시 비자발급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의미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재외동포법 취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면서도 영사관이 재량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전자의 경우 유씨에게 유리하지만, 후자의 경우 영사관이 다른 고려사항을 내세워 비자발급을 다시 거부할 길도 터줬다고 볼 수 있다. 4년 전 유씨 입국 불허 의견을 냈던 병무청은 이날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국적 변경을 통한 병역 회피 사례가 있을 수 있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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