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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8 04:59 수정 : 2020.01.08 13:57

파기환송심 첫 재판 석달 만에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출범 수순
판사는 범죄재발 방지책 주문
피고인은 실행에 옮겨 ‘이례적’

재벌 총수 ‘3·5법칙’ 적용사례 잇따라
법조계 “기업범죄 채찍 강화가 우선”
준법감시제도는 ‘범행 후 정황’ 불과
‘대법 양형기준상 감형여지 적다’ 관측

삼성그룹이 준법감시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 주문에 따른 것으로, 지난해 10월 이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첫 재판 이후 석달 만이다.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재판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전제했지만 이 부회장 쪽은 재판장의 주문을 착실히 실행에 옮기면서 집행유예를 기대하는 눈치다. 법조계에서는 재판부의 이례적인 주문을 일종의 사법 실험으로 보면서, 이 부회장의 양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3회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 정답을 알려준 숙제?

재판부가 낸 ‘숙제’는 기업범죄의 재발을 막으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부회장 재판처럼 판사가 선고도 하기 전에 피고인에게 범죄 재발 방지 대책을 주문하고 피고인이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정준영 부장판사가 평소 구현해온 ‘회복적 사법’의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회복적 사법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회복적 사법은 음주운전이나 폭행 사건 등을 일으킨 가해자를 반성으로 이끌어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돕는 것으로, 뇌물·횡령 등 경제 정의를 어지럽히고 사회 전반에 손해를 끼친 이 부회장의 기업형 범죄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앞서 술을 마시고 뺑소니를 저지른 30대 남성이 재판부가 정한 준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하자 집행유예로 감형해준 바 있다.

그러나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 개선의 여지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그 맥락은 비슷하다. 재판부가 요구한 준법감시제도는 기업 임직원이 법을 준수하는지 감독·견제하는 제도로, 미국은 연방 양형기준에 따라 준법감시제도(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를 실효적으로 운영할 경우 처벌을 완화한다. 범죄를 저지른 기업에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벌금을 부과하면서도, 준법감시제도가 설치돼 제대로 운영되면 양형에 참작해 준법경영을 확산시키자는 취지다.

준법감시제도 도입과 같은 재판부 주문이 감형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재판부가 거꾸로 이에 구속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이 충실하게 주문을 이행할 경우, 재판부가 양형 판단에서 이를 외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집행유예를 받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는 이 부회장 쪽은 진보 대법관으로 알려진 김지형 전 대법관을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오는 9일 김 전 대법관이 직접 기자들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연다. 최근 이 부회장은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는 평가를 받는 스웨덴 최대 재벌 발렌베리 그룹의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을 만나기도 했다.

김남근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는 “실효적 준법감시제도는 삼성전자·에버랜드 노조와해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 증거인멸 사건 등 조직적 범죄를 반복해서 저질러온 삼성에 위기 타개책으로 필요하다”면서도 “이를 굳이 이 부회장의 양형과 연결지어야 하는지, 국정농단으로 혼란을 겪은 우리 사회가 미국식 사법거래(플리바게닝)를 용인하겠다고 합의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채찍은 없고 당근만?

미국의 경우 기업범죄에 대한 채찍(형벌)이 워낙 강해 ‘당근’(감형)이 필요하지만, 기업범죄에 관대한 우리나라는 당근보다 채찍을 강화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 당시 재벌 총수들에게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의 이른바 ‘3·5법칙’이 적용되는 사례가 잇따랐다. 재벌 총수와 가족, 임원이 포함된 재벌 피고인이 1심이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을 가능성이 일반 경제범죄자보다 10%포인트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한국조세재정연구원). 2009년 이건희 삼성 회장 역시 비자금 혐의 등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는 “삼성이 실효적 준법감시위를 만든다 해도 문제가 있다. 기업이 불법행위를 저질러 재판을 받아도 개선의 여지만 보이면 감형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줘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준법감시제도는 삼성이 내놓은 사후 대책의 일종으로, 양형 기준 가운데 하나인 ‘범행 후 정황’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권고하는 양형 기준상 이 부회장은 감형의 여지가 크지 않다. 대법원은 경영권 승계 작업과 부정한 청탁을 인정하면서, 대통령 요구에 편승해 이 부회장이 적극 뇌물을 건넸다고 봤고 뇌물 액수도 항소심의 곱절(87억원)로 판단했다. 집행유예가 적용되지 않는 5년 이상 형을 받아야 하는데, 2010년 이후 1억원대 이상 뇌물을 공여한 경우 뇌물공여 범행만으로도 실형을 선고하는 사례가 잇따랐다고 특검은 설명한다. 재경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범행 후 정황은 형사재판에 크게 반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부회장은 대법원 선고로 유죄로 인정할 지점이 늘었고 실형 가능성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특검은 실질적 감경 요인은 형사처벌 전력이 없고 횡령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했다는 것뿐이라며 양형 기준에 따라 ‘최소’ 10년8개월이 선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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