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그림 모델은 피사체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등록 2020-02-22 14:43수정 2020-06-19 13:49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29. 로테 라저슈타인, ‘나와 모델’

모델의 기여도 지워진 미술의 역사
그림에서 화가·모델은 권력관계
이름 없는 자, 목소리 없던 모델들

“우리가 함께했던 좋은 작품들”
작업동료·평생친구 삼은 화가들
로테 라저슈타인, <나와 모델>, 1929~30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로테 라저슈타인, <나와 모델>, 1929~30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얼마 전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았다. 이 영화는 1770년 프랑스를 배경으로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와 그의 결혼식 초상화 의뢰를 받은 여성 화가 마리안느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물론 영화의 내용은 픽션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작정한 듯 영화 속에서 창작자와 모델의 전통적인 관계를 전복한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화가는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 모델을 통제했으며, 모델은 주체가 아닌 객체, 즉 꽃이자 대상물로서만 자리해왔다. 세상 어떤 꽃이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비로소 화가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모델 엘로이즈는 말없는 존재가 아니며, 단순히 형상만을 빌려주는 오브제도 아니다. 알다시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화가는 수차례 모델을 응시하고 관찰한다. 하지만 모델 엘로이즈는 화가인 마리안느에게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말한다. 모델 역시 그만큼의 시간 동안 화가를 보며 창작 과정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영화는 상영 내내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화가와 모델과 나란히 등장한 그림

누군가는 이런 전복을 보며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냉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비웃음은 틀렸다. 실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로테 라저슈타인(1898~1993)은 독일의 잘나가는 여성 화가였다. 베를린미술아카데미 입학을 허락받은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며, 1925년엔 예술 업적을 인정받아 정부에서 수여하는 장관 메달을 받았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자신만의 작업실도 얻었고 회화학교도 운영했다. 전대의 여성 화가들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이처럼 라저슈타인의 삶은 ‘개척자’ 자체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모델에 대해서도 남다른 태도를 갖고 있었다.

1925년 라저슈타인은 ‘트라우테’(본명 게르트루트 로즈)라는 애칭의 여성을 만난다. 전문 모델이 아닌 테니스 코치였는데, 라저슈타인과 만나면서부터 그녀는 라저슈타인의 전속 모델이자 평생 친구가 되었다. 라저슈타인이 그린 누드 작품 중 90%가 트라우테를 모델로 했으니 그녀는 누가 봐도 라저슈타인의 완벽한 ‘뮤즈’였다. 하지만 둘은 전통적인 화가-뮤즈 관계와 달랐다. 트라우테는 라저슈타인에게 그저 피사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작품 <나와 모델>을 보자. 라저슈타인은 손에 붓을 든 채 이젤 앞에 서 있다. 그 뒤에 선 트라우테는 라저슈타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캔버스를 주시하고 있다. 속옷 차림을 보니, 트라우테는 조금 전까지 누드 상태로 포즈를 취했을 것이다. 라저슈타인의 시선은 바깥쪽 관람객을 향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응시하는 듯하다.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고 있는 화가와 누드모델. 이처럼 둘이 동등한 비중으로 등장한 그림은 전례가 없다. 라저슈타인에게 트라우테는 단순히 꽃으로만 정의되는 사람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1937년부터 그들의 협력관계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나치 정권에 의해 ‘4분의 3 유대인’으로 분류된 라저슈타인은 스웨덴으로 망명해야 했고 이후 트라우테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1956년 라저슈타인은 아쉬움을 담아 트라우테에게 근황을 전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녀는 편지에서 최근의 누드 작업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가 함께했던 좋은 작품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작업들이지.” 라저슈타인에게 트라우테는 그림의 공동 제작자이자 믿음직한 작업 동료였던 것이다.

실비아 슬레이, <줄무늬 소파 위의 폴 로사노>, 1975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실비아 슬레이, <줄무늬 소파 위의 폴 로사노>, 1975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혹여나 라저슈타인과 트라우테가 ‘각별한’ 관계여서 남다른 화가-모델 관계를 유지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고정관념을 깬 화가-모델 커플은 그들만이 아니다. 미국의 여성 화가 실비아 슬레이(1916~2010)의 누드화를 보자.

줄무늬 소파 위에 기대앉은 벌거벗은 모델. 그의 포즈는 별다를 게 없다. 서양미술사를 통틀어 숱하게 쏟아져 나온 요염한 자세의 누드화이기 때문이다. 모델의 시선 역시 여느 누드화처럼 관객의 눈 밖으로 비켜나 있다. 그는 자신의 알몸을 무방비 상태로 전시한 채, 우리가 감상하게끔 ‘허락’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모델의 몸이 이제까지 익숙했던 그림 속 누드와 많이 다르다. 몸을 뒤덮고 있는 새카만 털! 그렇다. 그는 남성 모델이다. 고전적인 여성 누드의 포즈와 시선처리를 그대로 남성에게 적용시켰을 뿐인데, 이렇게 낯설고도 당황스러운 결과라니. 슬레이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감상했던 여성 누드의 포즈와 시선처리가 사실은 남성의 욕망이 투사된 환상일 뿐이라는 점을 폭로한다.

이 그림의 비범한 점은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슬레이는 작품명에 모델의 이름인 ‘폴 로사노’를 명기했다. 보통 누드화 모델의 이름을 작품명에 넣는 경우는 그가 유명인이거나 화가의 가족처럼 친밀한 사이일 때다. 그렇다면 과연 폴 로사노는 누구였을까? 그는 그냥 ‘무명 모델’이었다. 부업으로 모델 일을 하다가 우연히 슬레이를 만났을 뿐인, 평범하고 가난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슬레이는 자신의 작품에서 차지하는 모델 로사노의 기여를 알고 있었다. 로사노의 형상이 없었다면 ‘이성애자 남성 입맛에 길들여진 여성 누드화 실체 폭로’라는 그녀의 작품 제작 의도가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작품명에 로사노의 이름을 일부러 박아 넣었다. “슬레이는 모델들을 지적인 개인으로 표현하고 이름으로 구별했으며, 또 존엄과 존경, 존중을 담아 그렸다”는 앤드루 호틀 미국 로언대 교수의 평가 그대로였다. 그럼으로써 슬레이는 모델을 소모품이 아닌 한 명의 개인, 자연인, 하나의 우주로 존중한 것이다.

인물화 즐겼지만 모델 멸시한 르누아르

솔직히 말하겠다. 그림 작업에서 화가와 모델 간의 권력관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림을 창조하는 주인공은 화가라는 점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림 창조에 있어서 모델의 기여도를 부당하게 지워왔던 역사를 정당화하지는 못하리라. 인상주의 회화의 대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는 생전에 남긴 5천여점의 그림 중 2천여점이 여성 인물화였을 정도로 그림 인생 대부분을 모델에게 빚진 화가였다. 하지만 그는 여성 모델을 노골적으로 멸시했다. 르누아르의 아들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르누아르는 “내 모델들은 아예 생각이 없어”라고 대놓고 말했으며 “바보, 멍청이, 얼간이”라고 욕하면서 지팡이로 그녀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르누아르의 얘기대로 모델들은 생각 자체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르누아르가 굳이 모델들의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게 좀더 정확할 것이다. 이제껏 미술계는 여성 뮤즈를 보는 남성 작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것만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모델들 역시 트라우테이고 폴 로사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서양미술사 속 모델들은 언제나 이름 없는 자였고 목소리를 뺏긴 자로 남아야 했다. 화가와 작품 사이 어드메에 어정쩡하게 있었던 그들에게 이제는 제 몫을 돌려줘야 되지 않을까?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다. ‘여자 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본다. 아울러 미술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호출해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sempre80@naver.com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