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문 위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피고인의 요청은 그 자체로 특정 사건의 재판 내용이나 절차 진행을 유도하는 재판 관여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위헌적 행위이다.”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송인권)는 재판개입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56·사법연수원 17기) 부장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 판사에게 적용된 직권남용 혐의의 유·무죄만 따져도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임 판사의 재판 관여 행위마다 법관 독립 원칙에 어긋나는 헌법 위반 행위라고 거듭 지적했습니다.
임 판사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근무하던 2014~2016년 청와대 관심 사건에 개입해 선고 내용을 수정하게 한 혐의(직권남용)로 지난해 3월 기소됐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 행적’ 칼럼을 쓴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관련 사건 △민변 변호사 체포치상 사건 △프로야구 선수들의 약식명령 사건 등 총 3건입니다. 재판부는 임 판사가 맡은 ‘형사수석부장판사’라는 직책에 재판에 관여할 권한이 없고 일선 판사들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판결했기 때문에 직권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행위로 인한 형사 책임은 물을 수 없지만, “재판관여 행위는 형사수석부장판사의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에 해당해 징계사유 등에 해당”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형사 책임은 물 수 없어도, 징계사유에는 해당된다’는 게 1심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임 판사에 대한 징계는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이 궁금증은 생각보다 무거운 무력감을 남깁니다.
■ ‘서면 훈계’ 견책 징계… 두 건은 시효 지나
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을 받는 전·현직 판사는 모두 14명입니다. 지금까지 5명의 전·현직 판사가 총 3건의 1심 판결을 받았는데,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임 판사의 재판은 특히 법원 안팎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법농단 의혹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재판개입’ 혐의에 대한 사법부의 첫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임 판사가 본격적으로 검찰의 수사 선상에 오른 것은 2018년 가을입니다. 그는 그해 6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한 대법관 후보 10명에 포함될 정도로, 이른바 ‘잘 나가던’ 법관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프로야구 선수 임창용·오승환씨 원정 도박 사건에 개입하려 한 정황이 수사기관에 포착됐습니다. 그는 2016년 1월 같은 법원 김윤선 판사가 약식명령이 청구된 두 프로야구 선수의 재판을 정식 공판절차에 회부하려고 하자 “다른 판사들의 의견을 더 들어보고 처리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김 판사에게 말했습니다. 두 선수는 벌금 700만원에 약식기소됐는데, 약식기소가 되면 정식 공판을 거치지 않아도 됩니다. 결과적으로 김 판사는 종전의 결정을 철회하고 사건을 정식 공판에 회부하지 않기로 합니다.
진행 중인 사건의 재판 절차에는 대법원장이나 대통령은 물론, 법원 안팎 그 누구라도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독립해 심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임 판사의 행위는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한 위헌적 행위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대법원은 어떤 조치를 했을까요. 대법원은 자체 조사를 거쳐 그해 10월4일 ‘견책’ 처분을 내립니다. 프로야구 도박사건 1건에 관한 징계 처분 결과입니다. “사법행정권의 정당한 범위를 벗어나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관으로서의 직무상 의무를 위반했다.”(2018년 10월 12일 법원 관보) 헌법에 의해 신분을 보장받는 법관에 대한 징계 처분은 정직·감봉·견책 등 세 가지입니다. 견책은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준의 징계로, 징계사유에 관해 서면으로 ‘훈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2년이 훨씬 지나서야 한 징계가 고작 견책에 불과하다 보니 법원 안팎에서 ‘솜방망이 징계’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임 판사는 오히려 법원행정처를 상대로 징계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재판개입이나 관여가 아니라, 조언에 불과하다는 취지입니다. “법정최고형이 벌금형이어서 정식재판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벌금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 굳이 4~6개월 소요되는 공판절차를 진행해 유명 야구선수의 미국 진출을 막았다는 비판을 받을 게 우려돼 조언하게 된 것이다.”(2018년 10월 임 판사 입장문) 법관이 내는 징계 불복소송은 대법원에서 한 차례 판단합니다. 소송은 지난해 3월 법원행정처가 답변서를 제출한 이후 그대로 중단돼 있습니다. 임 판사의 형사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토 다쓰야 사건과 민변 변호사 체포치상 사건은 2015년 8월~12월 사이에 발생한 일이어서 3년의 징계 시효가 지났습니다. 징계로 이 두 행위에 책임을 묻을 길은 없어 보입니다.
■ ‘재판 결과 보자’며 중단된 추가 징계
임 판사 외에 사법농단에 연루된 다른 법관들은 그동안 어떤 징계를 받았을까요. 관련 징계는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2018년 5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기초로 김명수 대법원장은 같은 해 6월 모두 13명의 법관에 대해 징계를 청구했습니다. 대법원장의 징계 청구를 받아든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는 그해 12월 13명 중 8명에 대해 최종 징계 결정을 내렸습니다. 최대 6개월 등 정직(3명), 감봉(4명), 견책(1명)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1차 징계입니다.
2차 징계는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뤄졌습니다. 2019년 5월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농단 연루 법관에 대한 징계를 추가 청구했습니다. 검찰이 통보한 비위 법관은 모두 66명인데 징계시효인 3년이 지난 이들을 추려내고 심의를 거치다 보니 추가 징계는 10명에 그쳤습니다. 징계 청구 대상이 국회에 의해 공개된 1차 징계와 달리, 2차 징계는 66명의 면면은 물론, 징계 청구 대상이 누구인지, 앞서 징계를 받은 이들이 포함됐는지, 현재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징계 절차는 소송 대상이 되거나 검찰 기소를 이유로 중지된 상태입니다. 특히, 추가 징계 청구된 10명의 경우, 이 중 5명이 기소돼 재판을 받게 되면서 법관징계위원회의 심의가 사실상 중단됐습니다. 징계심의기일은 지난해 6월 한 차례 열린 뒤 “형사재판 진행결과를 지켜보겠다”면서 다음 심의 기일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법관징계법(20조)은 징계사유로 인해 법관이 기소되면 징계 절차를 정지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형사재판 결과를 보고 최종 징계를 판단하겠다는 것인데, 해당 재판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1심에서 줄줄이 무죄가 선고되고 있습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징계는 형사재판만큼의 뚜렷한 증거가 필요한 것은 아니고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고 법관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이 징계사유가 되기도 한다. 전직 대통령도 형사재판에 앞서 탄핵당했다. 법관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형사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판단 유보이자 법관에 대한 특혜 조치라고 본다”고 지적했습니다.
1차 징계에 불복한 5명의 판사(이민걸·방창현·박상언·김민수·문성호)는 대법원에 “징계 처분을 취소하라”고 소송을 냈습니다. 임성근 판사의 소송까지 합하면, 대법원에 계류 중인 징계 불복소송은 모두 6건에 이릅니다.
10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 시국회의'와 국회의원 박주민(왼쪽 넷째), 윤소하(왼쪽 둘째), 김종훈(맨 왼쪽) 의원 등이 지난해 3월11일 오전 국회에서 3월 임시국회에서 사법농단에 가담한 법관들을 탄핵소추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재판부 복귀에 탄력받는 탄핵 논의
추가 징계 절차는 중단됐고, 일부 재판의 1심은 무죄로 결론지어졌습니다. 재판개입은 위헌이지만 책임은 묻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법관 탄핵’ 논의에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 헌법재판소 재판관뿐 아니라 법관도 직무집행 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하면 국회는 탄핵 소추를 의결할 수 있습니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을 통해 법관 탄핵 여부를 최종 결정하게 됩니다.
지난 17일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판사들을 재판부에 복귀시킨 대법원의 조치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대법원은 검찰에 기소돼 재판 업무에서 배제됐던 판사 8명 중 7명을 다음 달 1일부터 재판 업무에 복귀시키기로 했습니다. 1심이 마무리된 판사(임성근·신광렬·조의연·성창호)뿐만 아니라, 1심을 받는 판사(심상철·이민걸·방창현)까지 포함됐습니다. 지난해 3월 이들을 재판 업무에서 배제하면서 밝힌 이유(“피고인으로 형사재판을 받게 되는 법관이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것 자체만으로 국민의 사법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지만, 근거 규정이 없는 재판 배제 조치를 장기간 유지하는 데 부담을 느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 결과, 3월1일부터 재판을 받는 이들이, 재판을 하는, 재판받는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게 됐습니다.
징계, 탄핵, 형사처벌, 민사상 불법행위는 모두 성립 요건이 다릅니다. 이 절차는 서로 중복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구성요건에 따라 각기 다른 절차에 의해 굴러갈 수 있습니다. 법원이 임 판사의 재판개입 행위를 위헌으로 인정한 만큼, 헌법에 의해 심판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지난 24일 시민단체들의 연대체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지원 대안신당 의원,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 윤소하 정의당 의원, 김종훈 민중당 의원은 “국회가 사법농단에 연루된 현직 법관에 대한 탄핵 소추를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해 정치권 진출을 공식화한 이탄희 변호사(전 판사)도 “사법농단의 본질은 헌법 위반이고 법관의 직업윤리 위반이다. 형사사건이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강조해왔고, 전국 각급 법원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체 ‘전국법관대표회의’도 2018년 11월 법원행정처 관계자가 재판에 관여한 행위가 “징계 절차 외에 탄핵 소추 절차까지 검토돼야 할 중대한 헌법 위반 행위”라고 목소리를 모은 바 있습니다.
법관 탄핵의 불씨를 댕기는 건 국회의 몫이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습니다. 2018년 사법농단 의혹이 불거진 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법관 탄핵 여론이 일었지만, 국회는 그 논의를 스스로 멈춰버린 전력이 있습니다. 재판개입을 요청하는 등 사법농단에 연루된 국회의원들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법농단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미 모두 법복을 벗은 상태입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 임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탄핵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수족으로 일했다는 심의관만 탄핵한다면 그 균형이 맞을지 의문이다. 심의관은 징계하고 윗선들을 탄핵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실기’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임지봉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유·무죄도 확정되지 않은 판사가 하는 판결을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사법신뢰가 땅에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사법부에도 장기적으로 좋은 일이 아니다. 법관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법원이 스스로 인정한 이상, 국회는 법관 탄핵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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