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상 국회의장이 지난해 12월27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회의 시작을 알리자 당시 심재철 원내대표 등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회의 진행을 막고 있다. 국회선집화법 도입 이후에도 여야가 국회에서 벌이는 물리적 충돌은 여전하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공범 ㄱ과 ㄴ이 체포되어 서로 분리된 채 신문을 받는다. 서로를 믿고 추가 범행을 진술하지 않으면 둘 다 징역 1년형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ㄱ이 공범 ㄴ의 여죄를 털어놓으면 수사에 협조한 대가로 6개월 감형을 받게 된다. 물론 공범 ㄴ의 형량은 징역 3년으로 늘어난다. 만약 ㄱ과 ㄴ 모두 상대방을 믿지 못하고 서로의 추가 범행을 털어놓을 경우, 둘 다 추가 형량과 감형이 이루어져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공범 ㄱ과 ㄴ 모두에게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은 서로 믿고 입을 다무는 것이고, 최악의 선택은 서로 불신해 각자 상대방의 여죄를 털어놓는 것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런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1950년 메릴 플러드와 멜빈 드레셔가 제시한 이 ‘게임 이론’의 핵심은 한 사람에게는 최선, 다른 사람에게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나만 털어놓고 상대방은 입 다무는’ 이기적인 선택의 가능성이다. 특히 서로 소통·협력을 하지 못하는 분리 상태와 형사의 회유가 그 가능성을 극대화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개방된 공간에서 자유롭게 서로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나만 규칙과 품격 혹은 정도를 지키고, 상대방은 합의와 원칙을 어기고 편법과 반칙을 사용해 선거 승리나 정치적 이익을 챙길 것이라는 불신과 불안에 휩싸이는 심리 상태는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죄수의 딜레마’와 유사한 ‘정치인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2001년 강원도 고성경찰서에 강도 혐의로 체포된 3명의 공범은 ‘죄수의 딜레마’ 효과가 극대화한 사례다. 분리되어 신문을 받다가 실제로는 일어나지도 않은 살인 사건을 다른 공범이 저질렀다고 서로 경쟁적으로 진술한 것이다. 1심에서 살인 공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들은 결국 항소심에서 허위자백임이 드러나 무죄판결을 받게 된다. 이렇듯 없는 죄도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죄수의 딜레마’로 인한 범죄 혐의의 입증과 그에 따른 처벌 강화는, 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사회 공익이 걸린 ‘정치인의 딜레마’ 상황에서는 어떤 선택들이 이루어져왔을까?
법 지키면 나만 손해 아닐까-‘후보자 딜레마’
4년 전 필자가 준비 없이 갑자기 지역구 총선 후보로 나서게 된 뒤 선거캠프로 찾아온 이들 중에는 위험한 사람들이 있었다. 선거 용품 일체 납품 계약을 하면 이중장부를 마련해 선거 비자금을 만들어주겠다는 사람, 이동용 저장장치(USB)를 들고 와서 ‘지역 유권자 수만명의 연락처가 있다’는 사람, 회원이 수천 혹은 수만명인 동호회나 종교단체, 향우회 등의 지지를 확보해주겠다는 사람, 상대 후보의 약점이나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퍼트려주겠다는 사람, 자신에게 현금을 맡기면 불법인 자원봉사자 음식 대접 등을 대신해주겠다는 사람…. 단호한 거절에 수긍하고 돌아간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는 앙심을 품고 비방을 하고 다녔다.
이들 혹은 이들을 소개하고 연결해준 사람들의 논리는 같았다. “상대방도 하는 일이고, 선거 때마다 해오던 일인데, 당신 혼자만 안 하면 질 수밖에 없다.” “걸릴 우려도 없거니와 걸린다 해도 후보에게 책임이 가지 않게 할 것이다.” 선거 후 다른 국회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상당수 지역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많은 후보가 검은 유혹을 떨치고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또 많은 후보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특히 선거가 박빙이거나 상대 후보에게 뒤지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는 후보들에게 유혹은 더 크게 작용한다. 상당히 많은 지역에, 선거 때마다 후보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달콤한 유혹과 악마의 계약을 제시하며 이익을 챙기거나 후보들의 코를 꿰어놓는 ‘선거 브로커’들이 존재한다. 천문학적인 선거비용 중 일부를 이들이 부당하거나 부정하게 챙기기도 하고, 당선된 후보에겐 ‘폭로, 제보 가능성’을 무기로 지방선거 후보 추천, 금품, 지역 이권이나 인사 청탁, 입법 로비 등을 요구한다. 그들 중 일부가 제보 등을 통해 단속되고 처벌받는다.
공약도 마찬가지다. 이익집단이나 유력자들은 선거철마다 후보자들을 찾아가 자신들이 원하는 공약을 포함해 달라고 요구한다. 지하철 연장, 도로 건설, 임대주택 없는 아파트 단지 건설, 특정 지역 개발 등…. 그중엔 실현 불가능하거나 윤리적·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공약도 있다. 실현되지 않더라도 선거 공약으로 내걸렸다는 이유만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르거나 거래가 활성화하는 등의 ‘효과’나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도 많다.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4년 내내 약속을 지키라는 시달림을 받거나, 불의의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바람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공약도 있다.
하지만 다른 후보들이 내세우는 선심성 공약을 혼자 거부하거나 누락하면 표를 잃고 선거에서 질 것이라 두려워하는 후보들이 너도나도 무분별하게 같은 약속을 한다. 즉, ㄱ후보와 ㄴ후보 모두 합법적인 선거운동만 하고 선심성 공약을 거부한다면 당과 자신의 역량에 따른 공정한 표를 받고, 선거법 위반 사법 처리 위험도 피하는 최선의 선택이 된다. 반면에 ㄱ후보는 선거법을 지키고 선심성 공약을 거부하는데, ㄴ후보는 불법 수단까지 동원하고 선심성 공약을 내세워 표심을 매수할 경우 (선거 후 당선 무효형만 선고받지 않는다면) ㄴ후보만 유리해질 것이다. 이로 인해 ㄱ·ㄴ후보 모두 공정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선거운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후보들의 불안 심리를 잘 아는 이익집단이나 유력자들은 선거 때마다 ‘후보자의 딜레마’를 이용해 이익을 챙긴다. 모든 후보가 소통하고 협력해서 불법 선거운동과 ‘나쁜 공약’ ‘포퓰리즘 선심성 공약’을 거부한다면, 그래서 깨끗하고 공정하며 투명하고 진실한 선거가 이루어진다면, 모든 후보와 지역 주민은 물론 국가 사회 전체에게 이로울 것이다.
제7회 전국동시 지방선거를 보름 앞둔 2018년 5월31일 대구시 반월당사거리에서 더불어민주당 한 후보자의 선거운동원들이 경쟁 후보인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자의 선거운동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내로남불 정치, ‘여야 정당의 딜레마’
20대 국회 최대 유행어는 아마 ‘내로남불’일 것이다. 국회의원 임기 중 여야가 교대되면서 같은 정당, 같은 의원들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5월을 기점으로 갑자기 역할을 교대했다. 절반을 넘는 다수 여당 시절엔 법안 날치기와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일삼고, 이에 맞서 온몸을 던져 물리력으로 저항하던 소수 야당의 몸부림을 ‘국회 폭력’ ‘동물 국회’ ‘낯부끄러운 후진 정치’로 공격하던 보수정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소수 야당이 되자 의장실을 점거하고, 물리력을 동원해 회의실을 봉쇄하고, 동료 의원을 감금하고, 의안과 등 국회 사무처를 장악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국회 직원을 폭행해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반면에 과거 보수 정권의 표현의 자유 탄압을 비판하고, 집회 시위를 주도하며 공권력의 강경 대응에 온몸으로 저항하던 민주개혁 정당과 정치인들은 집권 뒤 ‘국가원수 모독죄’ ‘내란 음모·선동’ ‘공권력 강화’ ‘불법 집회 엄단’ 등을 입에 올리며 다수의 힘으로 야당의 반대를 무력화했다. 사실 이런 내로남불의 후진 정치와 폭력 국회, ‘여야 정당의 딜레마’가 쳐놓은 덫에서 벗어나자고 소통·협력해서 만든 것이 ‘국회 선진화법’이다. 하지만 그 입법 취지와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규정과 문맥을 최대한 이용하거나 회피할 꼼수 찾기 경쟁에 몰입하더니, 급기야 국회법 자체를 무시하고 위반하는 과거 상태로 회귀해버렸다.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정부·여당은 장관 등 고위 공직 후보자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인사청문회에서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30~40년 전 문제는 물론 배우자나 자녀의 학교생활과 사생활까지 다 공개되고, 심지어 허위 사실까지 유포되며 공격과 비난에 시달리는 모습이 반복되니, 공직자 후보 추천을 받은 대상자마다 손사래를 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여당 시절에 같은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과 가족의 도덕성이나 사생활 문제는 비공개 청문회에서 검증하고, 이를 통과한 후보자를 대상으로 공개 정책 청문회를 하자는 합의가 모여 법 개정안까지 제출됐지만, 법안은 4년 내내 잠자다 20대 국회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예정이다. 자기들은 손해 보고 상대방만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불신, ‘정당의 딜레마’ 탓이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이 모두 구속되고 재판을 받으며 무거운 형량이 예상되는 불행한 현실 앞에서 모든 정당과 다수 정치인은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과 ‘정치 개혁을 위한 개헌’을 외쳤다. 국회는 개헌특위를 구성했고 정부는 개헌안을 마련해 발의했지만, 결국 물거품이 됐다. 서로의 의도와 진정성을 믿지 못한 채 불신의 늪에 깊이 빠진 정당들과 정치인들은, 결국 대화와 소통과 협상이라는 ‘정치’를 포기하고 상대방 비난과 공격이라는 ‘싸움’을 택했다. 마치 서로를 믿지 못해 각각 징역 2년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하는 ‘죄수의 딜레마’ 속 범죄자들처럼, 상대방에게 승리를 안기고 자신은 쓰라린 패배를 맛볼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두가 같이 피해를 보는 파행, 무산, 물거품을 택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20대 국회 내내 발생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포함한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자던 여야 정당 원내대표들의 서명이 담긴 합의서는 한 정당의 의원총회에서 추인받지 못하고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지난 대선 당시 모든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공통 공약이었던 검경 수사권 조정과 사법개혁 역시 상대방에 대한 불신 때문에 토론과 합의가 아닌 숫자 대결, 패스트트랙 충돌로 이어졌다.
국민에게 피해 주는 ‘정치인의 딜레마’
분리된 공범이 서로를 믿지 못해 상대방의 여죄를 털어놓는 ‘죄수의 딜레마’는 진실 발견과 정의 구현, 사회 안전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서로를 믿지 못해 공명선거,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를 포기하고 불법, 비난과 공격, 무질서와 물리력을 주고받는 ‘혼탁 선거’ ‘후진 정치’ ‘동물 국회’는 국가와 국민을 피해자로 만든다. 국민의 안전, 복지, 경제적 약자를 위한 법안이나 규제 개혁, 신산업 진흥, 산업구조 개혁 등을 담은 경제발전 법안 같은 민생 입법 법안이나 정책, 예산마저 상대의 정치적 이익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정치인의 딜레마’에 발목 잡히고 좌절되기 일쑤다. 남북, 한-일, 한-중, 한-미 관계 등 국가 안보와 번영을 위한 외교마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살인적인 경쟁과 입시 위주 교육, 불공정·불평등의 폐해를 개선하면서 학생의 재능을 계발하자는 교육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 이론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경제학, 경영학, 심리학 분야의 전략은 많이 개발되었다. 대한민국 ‘정치인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 각자의 과거를 반성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표창원: 국회의원이자 ‘범죄 프로파일러’인 표창원 박사가 의원으로서 보고 듣고 겪은 사실과 언론과 정부, 대중 등 정치 환경, 정치인 언행의 동기와 의도 등을 종합·분석해 독자들에게 보고한다. 한국 정치의 병리현상을 해부하고, 문제의 원인을 추적해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을 위한 국회와 정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