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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의원님, 마음으로라도 가책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등록 2020-05-17 09:03수정 2020-12-15 14:32

[토요판] 표창원의 여의도 프로파일링
⑧ 국회의원의 갑질

갑질 피해 아파트 경비원의 죽음
비극 막는 데 앞장서야 할 국회
법과 제도 구축에 소극적인 이유
의원 스스로가 ‘갑 중의 갑’인 탓

소신 발언한 공무원 불러 꾸짖고
국무위원·국감 증인에게 고함 막말
보좌진도 의원 갑질에 고통받아
갑질 대신 할 일 해야 을들 보호
지난 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갑질 피해’로 숨진 최희석 경비노동자 추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갑질 피해’로 숨진 최희석 경비노동자 추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서울 강북구 소재 한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59)씨의 비극적인 사망이 국민적 충격과 분노,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 원인이 입주민의 갑질과 폭행 때문이라고 알려지면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 목소리가 높다. 2014년에도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주민의 막말과 갑질을 견디다 못한 경비원이 분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나는 등 갑질 피해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거나 정신질환 등 후유증을 앓는 심각한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 2014년 압구정동 사건 이후 국회에서 경비업법과 공동주택관리법을 개정해 경비원에게 안전관리 외의 일을 시키지 못하게 하는 등 보호조치를 마련했다. 하지만 ‘법대로’를 고집하다간 일자리를 잃는 현실 앞에서 법은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아파트 경비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벌의 운전기사, 재벌집 가사도우미, 대학원생 조교, 공무원, 회사원, 노동자, 가맹점주 등 사회 각 분야의 ‘을’들이 갑질 피해에 시달리다가 죽거나 다치거나 병드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있다. 갑질 피해를 당하는 피해자가 이상하거나 특별하거나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학습된 무기력’ 때문이다.

소리 없는 살인자, ‘학습된 무기력’

1967년,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우울증의 원인을 찾는 연구의 일환으로 개들을 우리에 가두고 전기충격을 가하는 끔찍한 실험을 했다. 전기충격이 가해졌을 때 도주하거나 중단시킬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우리에 있었던 개들은 이후 다른 우리에서도 전기충격이 가해지면 최선을 다해 피하거나 중단시킬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전기충격을 멈출 수 없는 우리에 갇혀 있던 개들은 이후 쉽게 도피하거나 중단시킬 수 있도록 설계된 우리에서도 고통스러운 전기충격을 그대로 감내하는 무기력한 모습들을 보였다. 지금이라면 동물학대로 비난받아 마땅한 이 실험으로 입증된 ‘학습된 무기력’은 이후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왜 가해자에게 저항하거나 도피하지 못하고 지속적이고 습관적인 폭력 피해를 감내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아동학대, 학교폭력, 군대 내 폭력 등에도 같은 심리가 작용한다. 모두 가해자는 지배나 통제권 즉 권력을 쥔 갑이고 피해자는 지배받고 통제받고 의존하는 을의 위치에 있다. 처음 폭력이나 가해 행위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충격을 받고 저항 혹은 도주를 시도하거나 이웃이나 가족, 경찰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지위나 위력, 혹은 가면 쓴 모습으로 인해 저항이나 도주에 실패하고 구조받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빠지면서 저항이나 도주, 구조 요청을 포기하고 폭력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채 서서히 생명이 고갈되어 가거나 우울증, 절망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갑질과 학습된 무기력 문제는 개별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 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갑질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갑질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고 그 실행체계를 촘촘히 갈고 다듬어야 한다. 그래야 소수의 불량한 갑들의 갑질이 바로 눈에 띄고 두드러져 적발과 엄한 처벌이 용이해진다. 피해자도 학습된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법과 제도에 의한 구조와 지원 및 보호를 편하게 받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정치 그리고 국회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경비원을 갑질로부터 보호하겠다며 만든 경비업법 개정안과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이 경비원의 고용보장은 빼고 ‘갑질 방지’ 조항만 넣어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오랫동안 처리되지 못하던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역시 타협을 통한 개악을 거쳐 가까스로 입법은 되었지만, 대상이 축소되고 요건이 모호해지고 직접 처벌 규정이 제외되는 등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공사나 제조 현장에서 안전관리 부실과 갑질 등으로 인한 사망 야기 시 살인죄에 준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기업살인법(중대재해처벌법)과 건설 시공 안전 관련법 등의 입법 요구를 무시한 국회는 결국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를 막지 못했다.

국회가 본연의 임무인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 그 핵심인 ‘갑질 방지’ 법과 제도 구축에 소극적인 이유가 뭘까? 헌법과 법률에 정한 봉사 대상인 국민, 그 99%를 차지하는 을보다 이들에게 갑질을 할 수 있는 갑, 국민의 1%를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는 뭔가 커다란 현실적 이해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더해 국회의원들 스스로가 ‘갑 중의 갑’인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 한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특정 법안에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관련 정부 부처 과장에게 고압적으로 윽박지르던 한 의원은 그 공무원이 소신을 굽히지 않자 격하게 분노하며 자신의 자리로 오라고 명령했고, 결국 위원장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회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이 흔하게 발생하는 광경이다 보니 누구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언론에 기사 한 줄 나지 않았다. 잘못한 것이 없는 공무원은 해당 국회의원을 찾아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높으신 의원님의 심기를 달래지 않으면 그 불똥이 자신의 상관의 상관, 심지어 장관에게까지 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국회에 출석한 장관 등 국무위원이나 국정감사 증인 등에 대한 고함과 막말, 협박과 야단은 방송을 통해 숱하게 중계되었다. 국민이 볼 수 없는 곳에서의 갑질은 더욱 잦고 심하다.

갑질하는 의원과 피눈물 보좌진

더 큰 문제는 의원들이 이러한 갑질을 갑질이 아니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낮은 인권 감수성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에게 ‘감히 어떻게 거부, 말대꾸, 불량한 자세 등을 취하느냐’는 인식을 드러내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원하는 답이나 자료를 얻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고성과 호통과 협박과 불이익 암시라고 믿는 의원들 역시 많다. 간혹 굴하지 않고 저항하거나 소신을 피력하는 공무원들이 나타나지만 결국 이들은 상관이나 주변의 압력이나 설득에 못 이겨 ‘공개 사과’를 하게 된다. 사과를 받지 않으면 법안 심의나 의결, 회의 속개를 못하겠다는 의원 앞에서 버틸 장사는 없다. 용감한 저항이 결국 고개 숙이는 굴욕으로 마무리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공직사회에는 ‘학습된 무기력’이 퍼지고 자리잡게 된다.

의원들의 갑질을 일상적으로 대하는 상습 피해자는 당연히 보좌진이다. 채용과 해고의 전권, 가히 ‘생살여탈권’을 쥔 의원에 대한 불복이나 저항은 곧 실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직장을 잃을 뿐 아니라 다른 의원들에게도 좋지 않은 평이 공유되며 재취업의 기회조차 박탈될 수 있는 현실은 갑질의 토양과 자양분이다. 국회 보좌진들이 신분을 인증한 뒤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 올라온 글 몇 개를 소개한다. 올린 사람의 신상 보호를 위해 내용은 일부 윤색했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다고 한다. 고용노동부에서 예시로 든 것들이 거의 다 국회에서 숨쉬듯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국회 조직문화 그 자체이다. 영감들은 자기 이사할 집 알아봐달라, 내복 사다놔라, 부모님 댁에 컴퓨터 설치해라, 별의별 사적 심부름을 다 시키면서도 국회의원이라서 당연히 자기가 제공받아야 할 서비스라고 생각한다.”(2019년)

“의원 보좌진은 국가공무원이다. 그러나 정작 영감들은 보좌진을 공무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사노비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 아침밥 차리기, 집 택배 수령, 속옷 챙기기. 의원회관에서 또 다른 전태일이 부활한다면 그때는 정녕 바뀔 수 있을까?”(2019년)

“안녕하세요 의원님. 조금만 더 버티시면 공소시효 만료도 도래하겠네요. 저희 아버지 딸인 저는, 이렇게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잘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힘든데, 의원님의 자녀분들은 그저 의원님을 자랑스러워하며 행복하겠지요. 조금이라도 가책을 느끼시길 바랍니다.”(2019년)

“내가 의원 자식들 휴가 비행기표 끊는 데까진 투덜거리며 했거든. 그런데 의원이 어제 밤에 연락 와서 그 자식들 명절 열차표를 잡으라네. 새벽부터 일어나서 말이야. 대기번호 받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이거 뭐 하나 싶어.(자식들은 자고 있겠지?) 예매 실패하면, 하루 종일 취소 표 뜨는지 사이트 들어가봐야 하는데, 어린것들이 벌써 특권에 찌들어 가지고 한번은 뮤지컬 공연 표도 구해 달라 하더라고.”(2018년)

의원이 갑질을 하는 권위적인 사람일 경우, 보좌진 간에도 직책과 급수에 따라 갑과 을이 나뉘며 ‘보좌진 간 갑질’ 역시 흔하고 심하게 발생한다. 인턴, 9급, 8급, 7급, 6급 비서 등 하위직 보좌진은 의원의 갑질에 비서관 및 보좌관 등 소위 ‘관급 보좌진’의 갑질까지 더해져 ‘이중 갑질’에 시달리기도 한다.

당연히 모든 국회의원이 갑질을 하는 것은 아니며, 행정부 공무원과 국회 사무처 직원 및 보좌진들을 ‘입법 동료’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개념 있는 의원’들도 다수다. 아파트 입주민, 재벌, 건물주, 사업주… 다 마찬가지다. 문제는 어떤 분야, 조직, 기관, 업체에나 인성이 나쁜 갑들이 있을 수 있다는 불변의 사실이다. 법과 제도, 문화, 관행이 제대로 구축되고, 빈틈없이 시행되며, 수시로 점검받고, 필요한 수정과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갑질은 반드시 발생한다. 법과 제도 구축은 국회의 몫이며, 그 실행은 행정부의 책임이고, 감시 및 이행 담보는 감사원과 수사기관 및 사법부의 역할이다.

의원 갑질부터 잡아야 ‘갑질 방지’ 제도화

그런데 그 시작과 출발을 선도하고 주도해야 할 입법부, 국회 스스로 갑질을 허용하고 방관하는 법과 제도, 문화와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 을들은 저항, 도주, 회피, 구조 요청을 하다가 좌절하거나 동료의 좌절을 목격하고 집단적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울증 발병률과 자살률은 낮아지지 않을 것이고, 간헐성 폭발장애(이른바 ‘분노조절장애’)에 의한 폭력과 파괴, 방화 범죄도 줄지 않을 것이다. 국회와 정치, 국가 체제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도 높아져 점점 더 심한 ‘위험사회’로 나아갈 우려도 상존한다.

제21대 국회, 할 일도 많지만 우선 스스로부터 돌아보고 점검하자. 다행스럽게도 20대 국회에서 널리 알려진 갑질 국회의원 중 여러 명이 낙천되거나 낙선했다. 갑질 관행에 물들지 않은 초·재선이 많은 21대 당선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갑질의 유혹에 대해 차분히 살펴보고, 선거기간 함께 일한 선거캠프 관계자들의 솔직한 평가와 의견을 구한 뒤 자신의 언행을 돌아보고, 갑질 없이 제 일 제대로 하는 의원이 되는 길을 탄탄하게 준비하는 것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국민, 보좌진과 국회 사무처 직원들과 관계부처 공무원들을 존중하면서 치열하게 입법 성과와 행정부 감시 효과를 달성하는 의원들이 많아질 때, 아파트 경비원과 노동자, 회사원, 알바생 등 우리 사회 을들이 갑질로부터 보호받는 법과 제도가 제대로 구축되고 그 실행 역시 충실해질 것이다.

▶표창원: 국회의원이자 ‘범죄 프로파일러’인 표창원 박사가 의원으로서 보고 듣고 겪은 사실과 언론과 정부, 대중 등 정치 환경, 정치인 언행의 동기와 의도 등을 종합·분석해 독자들에게 보고한다. 한국 정치의 병리현상을 해부하고, 문제의 원인을 추적해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을 위한 국회와 정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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