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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법정에 선 성범죄 피해자가, 한점의 두려움 없도록

등록 2020-06-10 21:06수정 2020-06-11 07:02

11일 조주빈·공범들 첫 재판
목격자 거의 없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증언으로 2차 피해 우려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챌까 겁나”
공간 분리한 ‘중계법정’ 부족하고
목소리 변조 시스템은 아예 없어
재량 맡긴 탓 ‘가림막’만 놓은 적도

‘피해자 보호’ 판사·변호인 인식차
재판 참여권도 방어권만큼 보장을
텔레그램에 ‘박사방’을 열고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씨가 지난 3월 검찰에 이송되고 있다.
텔레그램에 ‘박사방’을 열고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죄를 저지른 ‘박사’ 조주빈씨가 지난 3월 검찰에 이송되고 있다.

텔레그램 성착취 ‘엔(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씨에 대한 첫 재판이 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이현우) 심리로 열린다. 실체적 진실과 범죄의 경중을 따지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법정 증언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성범죄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법정 증언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의 피해자 변호인들은 재판부에 비공개 증인신문을 요청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퇴정과 가림막 설치 등을 포함해 구체적인 피해자 보호 조처를 검토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범죄 피해자가 자유롭게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실효적인 보호 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울지 마세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법정에서 직접 진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달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로 한 지방법원 법정에서 10분 정도 진술한 ㄱ씨에게 재판부가 건넨 말이다. ㄱ씨가 처음 법정에 서겠다고 했을 때 그에게 법률조언을 해준 변호사는 2차 피해를 우려해 말렸지만, 그는 법정에서 꼭 진술하고 싶다고 했다. “내 피해 사실을 공소장에 적힌 종이 한장 정도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게 그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변호사에게 조언을 받은 ㄱ씨는 재판부가 검찰 구형을 듣고 선고일을 정하기 직전 방청석에서 손을 들었다. 재판부는 ㄱ씨를 증인석으로 불렀고 말할 기회를 줬다. ㄱ씨의 변호사는 <한겨레>에 “변호사·검사·법관의 잘못된 언행으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은데, ㄱ씨는 다행히 법정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고, 피해자로서 수사·재판 과정에서 느낀 답답함을 일부 해소할 수 있었다”며 “피해자를 위한 진정한 해결이 무엇일지 사법기관이 고민해볼 만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돌발적으로 이뤄진 증언이어서 별도의 보호 조처는 없었지만 ㄱ씨는 손발을 떨고 울먹이면서도 자신의 피해를 끝까지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ㄱ씨처럼 용기를 낼 수 있는 피해자는 극히 드물다. 성범죄 피해자가 법정에서 2차 피해 우려 없이 피해 사실을 증언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여전히 미흡한 ‘피해자 법정 보호’

현행 형사소송법과 성폭력처벌법 등에는 △피해자 진술의 비공개 △피고인 퇴정 △비디오 등 중계장치에 의한 증인신문 △심리 비공개 등 재판 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방지하려는 규정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피해자 보호 조처를 어느 수준으로 할지는 재판장의 재량에 맡겨놓아 판사의 ‘성인지 감수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2018년 7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재판 때도 피해자 증인신문이 비공개로 열렸지만 정작 안 전 지사와 피해자 사이를 분리한 것은 가림막 하나뿐이었다. 이 때문에 안 전 지사의 헛기침, 숨소리 등이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나왔다.

성범죄 피해자와 피고인을 공간적으로 분리해 ‘화상증언실’에서 피해자가 진술하면 이를 송출받아 재판부·검사·변호사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중계법정’ 방식도 있지만 서울중앙지법에서 이 시스템이 설치된 법정은 단 두곳뿐이다. 조주빈씨 재판을 맡은 형사합의30부의 전속법정에는 별도의 화상증언실이 딸려 있지 않다. 조씨 재판에서 중계법정 방식을 활용하려면 다른 법정을 빌리거나 별도의 중계장치를 설치해야 하는 것이다.

텔레그램 등 비대면으로 성착취물 제작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이 주로 희망하는 방법은 목소리 변조다. 가림막을 사용하든 중계법정에서 증언을 하든 목소리만 나와도 피해자가 특정돼 보복 등 2차 피해 우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변호인은 “피해자가 피의자를 법정에서 직접 마주 보지 않더라도 전화 등으로 성착취물 제작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은 피고인들이 목소리만 듣고도 자신이 누군지 알아챌까봐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 변조 시스템이 도입된 법정은 국내 법원에 존재하지 않는다.

■ 피고인 방어권은 보장되지만…

법정에서 피해자 보호 제도가 미흡하다 보니 재판 현장에서 느끼는 판사와 변호사 간 인식 차이도 크다. 대법원 젠더법연구회가 지난해 1~2월 판사와 변호사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설문에 응한 36명의 피해자 변호인 중 “법정에서 피해자 보호가 충분하다”고 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반면 법관의 12%, 피고인 변호인의 30.4%는 “충분하다”고 답했다.

피해자의 재판 참여권 보장은 미흡하지만 성범죄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은 일반 형사사건처럼 보장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목소리가 재판에 균형있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는 아직 공판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재판부에 20부가 넘는 반성문을 제출했다. 성범죄 피해자 ㄱ씨는 “성범죄 피고인들이 감형을 위해 반성문까지 쓰며 재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견줘 피해자들은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당사자인데도 상대적으로 형사재판에서 소외돼 있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한 다른 변호사도 “증인신문 공개나 증인 출석 여부는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면서도 “사법시스템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호하는 만큼 피해자의 재판 참여권은 충분히 보장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법정에 설 용기를 낸 피해자들이 조금이나마 편안한 상황에서 진술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윤영 장예지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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