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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정치질’ 만연한 곳에서 시스템이 녹슨다

등록 2020-07-11 17:43수정 2020-07-11 19:53

[토요판] 표창원의 여의도 프로파일링
⑫ 사람을 살리는 정치, 죽이는 ‘정치질’

국민 생명 지키는 일이 본질인 정치
정치가 실종된 곳에서 ‘정치질’ 난무
힘과 돈, 지위와 권한 가진 자들끼리
연결해 공고한 상생협조 카르텔 구축

최숙현 선수를 죽인 것도 ‘정치질’
체육계 폭력 문제로 생긴 기구·제도
최 선수 간절한 호소에도 작동 안해
제 역할 하지 않은 이들 꼭 밝혀야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진상규명 및 스포츠 폭력 근절,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국회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법과 제도, 정책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관리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녹슬고 오작동하게 되기 쉽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진상규명 및 스포츠 폭력 근절,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국회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법과 제도, 정책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관리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녹슬고 오작동하게 되기 쉽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상에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다섯 가지 위험이 있다. 전쟁, 재해, 인재, 질병, 범죄가 그것이다. 인류 문명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합의를 유지하고 있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당연히 정치의 근본 역할은 전쟁을 막고, 재해를 예방하거나 최소화하고, 보건 및 의료 체계를 지속 발전시켜 질병으로부터 국민 생명을 구하고, 범죄 예방과 수사 그리고 피해자 보호와 지원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는 세상에서는 사람들 대다수가 평화와 안전, 건강을 최대한 보장받은 상태에서 문화와 경제, 개인적 성취 등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국민이 전쟁과 내전의 참화 속에 내던져지고, 폭우와 가뭄 등 반복되는 재해에 대비가 부실하고, 툭하면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는 안전불감증이 만연하고, 공공의료 기반이 취약해서 감염병이나 중증질환에 약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현상이 정치가 타락하거나 부패하거나 방만하거나 실종된 사회의 현실이다.

정치가 실종되거나 제 역할을 못하는 곳에는 예외없이 ‘정치질’이 난무한다. ‘정치질’은 힘과 돈, 지위와 권한을 가진 자들끼리 긴밀하게 만나고 사귀고 연결하며 공고한 상생협조의 카르텔을 구축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러한 사회권력 내부, ‘인사이드’로 진입하기 위해 유력자에게 접근하고, 연결고리를 찾고, 뇌물이나 선물을 제공하는 행태 역시 ‘정치질’이다. 경쟁자나 친분관계 없는 외부인을 모함하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행위도 ‘정치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전과 선동, 가짜뉴스 조작 등으로 민심을 호도하고 지역감정이나 이념갈등 등을 일으켜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 역시 대표적인 ‘정치질’이다.

‘정치질’로 얼룩진 아픈 역사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와 동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장삼이사 평범한 국민이 아무리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도, 정치가 썩고 ‘정치질’에 탐닉할 때마다 전쟁과 재난, 질병으로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고, 부정부패와 범죄로 피눈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안타까운 희생과 국민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정치의 큰 틀이 바로잡힌 1987년 민주화, 그리고 2017년 탄핵촛불 이후 우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평화와 전쟁위협의 감소였다. 군사적 도발과 충돌, 한반도 긴장 고조로 손상될지도 몰랐던 생명이 안전해진 것이다. 물론,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정치질’로 위협이 고조되고 우리 군인,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일도 발생하곤 한다. 이런 ‘북한 변수’에 흔들리지 않고 국제사회와 함께 평화를 향한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자 힘이다. 반면 ‘정치질’은 북한 이슈를 과장하거나 증폭하여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다. 그 결과 긴장이 고조되어 국지적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고, 거리에서 이념갈등 집회 참가자들이 충돌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개성공단, 금강산관광 등 남북협력 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한 이들의 삶이 무너진다. 남북관계와 연결된 한-미, 한-중, 한-일 관계가 미묘하게 꼬이면서 무역과 투자, 교류에 종사하는 국민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피해를 입고 실의와 좌절에 빠진다. ‘정치질’이 사람을 죽이는 대표적인 사례다.

적재적소 ‘공정한 인사’는 정치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최근의 예가 무수한 생명을 살리고 피해를 방지한 케이(K)-방역, 그 중심에 있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과 방역 공무원들이다. 과거 보수정권 시절에도 독재정치와 인권탄압, 빈부격차 심화 등을 논외로 하고, 적재적소 인사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경제를 살리고, 공공보건 시스템의 기초를 닦는 등 ‘사람을 살린 정치’의 좋은 예들이 있다. 반면에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측근 인사, 보은 인사 등 ‘정치질’의 결과로 한강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고, 아이들이 화마에 휩쓸리고, 지하철 승객들이 화염에 갇혀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예상되는 폭우와 홍수의 피해를 방치해 인재를 야기한 사례도 부지기수다. 기록된 인재만 문제는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숱한 기업이 도산하고, 직장인이 일터를 잃고, 가정이 붕괴됐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악화돼 발생한 생명 손상 역시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렇게 모든 공직과 공공기관 업무는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 생명과 연결된다. 불공정한 인사가 있는 곳에는 생명 손상의 위험이 함께한다고 믿어도 된다.

‘정치질’이라고 평가받을 행위를 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자신들이 정치를 한다고 강변한다. 실제 그들 중 다수는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더 못 죽인 것이 오히려 한스럽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과 닮은 범죄심리 ‘합리화’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고,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공정하고 사회의 규범을 지키라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규범을 어기는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되고, 결국 하늘에서 내리는 천벌을 받는다는 인식이 각인된다. 가정, 학교, 종교의 교육은 물론 책과 만화, 방송과 영화 등 각종 미디어가 모두 사회화 기제이고 도구다. 그래서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면 불안이 몸을 지배하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류속도가 증가해 피부가 간지러워지고 분비물이 증가하는 생리현상이 나타난다.

최숙현 선수를 죽인 ‘정치질’

그런데 차츰 성장하면서 처벌받지 않는(혹은 견딜만하게 경미한 처벌만 받고 넘어가는) 나쁜 짓을 경험하게 되고 점차 불안정서를 덜 느끼게 되는 ‘둔감화’ 현상이 나타난다. 얼굴이 두꺼워지는 것이다. 불안반응을 스스로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나쁜 짓을 합리화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내가 하는 행동은 다른 나쁜 사람들이 하는 짓과 달라.(가해의 부정) 직접 누군가를 해치거나 큰 손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아.(피해의 부정) 날 비난하는 놈들이 실제론 뒤에서 나보다 더 나쁜 짓들을 하면서.(비난자에 대한 비난) 내 행동이 설사 윤리, 규범, 법에 위반되더라도 궁극적으로 더 큰 정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괜찮아.(상위 가치에의 호소)

성장과정에서 이 합리화의 방어기제가 얼마나 강하고 깊게 내면화되는지는 개인차가 크다. 이는 인격, 성격, 품성, 성향의 차이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정치질’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합리화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나 교육적 개입이 매우 부족한 채로 살아와 ‘합리화 방어기제’가 고착화·고도화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 현장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런 이들은 사실 모든 직장, 조직, 사회에 존재하며, 정치질에 서툰 사람들에게 아픔과 피해를 안기며 살아간다.

수사와 재판 결과를 지켜봐야 정확하게 누가 어떤 짓을 해서 결국 최숙현 선수를 죽음으로 내몰았는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물론 수사와 재판의 한계로 실상이 다 밝혀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와 별개로 우리는 빙상 조재범, 유도 왕기춘, 축구 정종선 등 가해 혐의 사례들과 무수한 피해 호소를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운동선수 인권이 의제가 되자 국회가 실체를 조사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가 전담기구를 만드는 등 정치가 작동했다. 국가인권위원회, 경찰, 검찰 등도 나섰다.

그런데 경주시 트라이애슬론 팀에서는 일제강점기 고문을 연상케 하는 극단적 가혹행위가 지속적으로 일상화돼 벌어졌다. 무엇보다 신체적·정신적 고문과 가혹행위가 그토록 오래 지속됐다는 사실은 그 모든 법과 제도와 정책과 교육이 얼마나 허술하고 무용지물에 가까웠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마치 근육이 발달한 건강한 사람이 바이러스나 세균, 기생충에 허무하게 스러지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 중심에 ‘정치질’이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스포츠 폭력의 예방, 적발, 조사, 처벌, 피해자 보호 시스템이 무력화된 이유는 그 시스템 내에서 누군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역할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책임과 권한 등 자원 배분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서다. 법과 제도, 정책을 잘 만들어도 그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지 수시로 점검하고 관리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녹슬고 오작동하기 쉽다. 최숙현 선수가 경주시, 철인3종경기협회,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문화체육관광부, 경찰, 국가인권위원회 등 6개 기관에 절박한 신고와 민원, 탄원, 호소를 했지만 어떤 기관의 어떤 담당자도 제 역할, 제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원인 역시 철저히 규명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실효성 있는 개선책과 재발방지 대책을 시행하고 지속적인 점검도 해야 한다.

‘정치질’을 죽이고, 정치 살려야

20대 국회에서 목격한 것은 정치와 ‘정치질’의 복잡하고 위험한 공생이었다. 국회 의원회관 로비와 각층 복도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오간다. 각 이익집단의 ‘대관업무’ 담당자의 실질적인 로비 활동도 있고, 이런저런 청탁을 하려는 지역 유지나 업자나 정치 주변 인물들도 많이 눈에 띈다. 선거철이 되면 각 당은 소속 의원들에게 각종 직능단체 대표자와 관계자들을 만나 지지를 확보하라고 한다. 그 결과로 노조, 학술단체, 예술인단체, 체육협회, 은퇴자단체 등이 특정 후보나 정당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는 일도 흔한 풍경이다. 선거 후 관련 단체 대표나 관계자들이 공직에 임명되거나 각종 선거에서 공천을 받는 등 ‘보상’을 받는 모습도 공공연하다. 심지어 이들과 연루된 사건이 흐지부지 무마된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국회 상임위원회나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특정 국회의원이 특정 단체나 협회 혹은 업계 등의 이익을 강하게, 때론 지나치게 대변하는 모습도 종종 발견된다. 그 결과 공정성을 높이고, 문제를 해결해 사고를 방지하고, 피해를 줄이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법안들이 좌초되거나 왜곡되는 일도 발생한다. 세월호 참사, 지하철 구의역 김군,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씨,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희생자, 최숙현 선수…. 참담하고 충격적인 사건 뒤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정치질’의 악습을 더이상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해선 안 된다. ‘정치질’을 정치라고 호도해서도 안 된다. 박근혜 정권을 무너트린 핵심 원인이 고이고 썩은 보수 정권과 정당의 ‘정치질’이었다. 지금 진보 정당과 정권을 힘들게 하는 문제의 핵심도 ‘정치질’임을 깨닫고 합리화의 유혹을 용기 있게 떨쳐내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정치혁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활발하게 작동해 안타까운 생명 손상을 막고, 최대한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표창원: 전직 국회의원이자 ‘범죄 프로파일러’인 표창원 박사가 의원으로서 보고 듣고 겪은 사실과 언론과 정부, 대중 등 정치 환경, 정치인 언행의 동기와 의도 등을 종합·분석해 독자들에게 보고한다. 한국 정치의 병리현상을 해부하고, 문제의 원인을 추적해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을 위한 국회와 정치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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