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사상 및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한 여성 작가 배제 관행 개선을 위한 의견표명’이라는 제목의 차별시정위원회 결정문을 발표했다. 이 진정은 게임업계에서 활동했던 여성 여섯명이 소위 ‘메갈몰이’로 입은 피해에 대하여 제소한 것으로, 여러 게임회사 대표가 피진정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권위는 여섯 진정인의 청구를 각하했다. 그러나 이것이 부당한 진정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각하의 이유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우선 게임회사의 직원이었던 한명은 진정 시기가 사건 발생 시기로부터 1년 이상 경과되어 인권위가 개입 가능한 시점을 넘겼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명은 프리랜서 사업자로서 인권위법에서 규정한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여기에는 업계의 특수성이 어느 정도 작용한다. 게임시장이 모바일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이른바 수집형 아르피지(RPG)라는 것이 주요한 장르로 떠올랐다. 이런 게임들의 핵심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아르피지보다는 수집이다. 게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캐릭터나 장비들을 확률형 뽑기로 판매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백장의 일러스트(주로 미소녀 캐릭터를 그린)가 필요해진다. 대부분의 개발사는 이를 여러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의뢰해 수급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는 고용이 아니라 ‘납품’이 이루어진다. 이 밖에도 웹툰을 비롯해 게임 홍보를 위한 다양한 요소들이 이 프리랜서 노동을 통해서 수급된다.
게임업체들이 내놓은 해명들 역시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업체가 피진정인들의 작업물을 배제한 것은 페미니즘이나 소비자의 항의 때문이 아니라, 품질이 낮아서거나 개발 과정에서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반면 일부 업체는 피진정인들의 작업물이 배제되는 데 이른바 ‘소비자의 항의’가 작용하였다고 실토했다. 이들은 게임 운영이 영리 목적을 위한 것이며, 소비자와의 소통이 게임 및 회사의 존폐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권위는 이런 게임회사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페미니즘과 관계없는 결정이었다고 주장한 회사들의 경우에도 당시 게시되었던 공지 등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러스트” “사회적 이슈” “논란이 발생하거나 또는 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일러스트”와 같은 표현 등을 통해 ‘메갈몰이’가 원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인권위의 판단이다. 또 영리기업으로서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는 “소비자의 요구가 인권·정의와 같은 기본적 가치에서 이반된 것이라면 이를 무시하거나 소비자를 설득하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모습”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리하면, 업체들이 상관없다고 주장한 것은 눈 가리고 아웅에 해당하고,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사회구성원으로서 기업이 갖춰야 할 윤리에 어긋나는 변명이라는 것이다. 인권위의 결정문은 게임계에서 지속되는 ‘메갈몰이’가 비상식적이고 반인권적인 행태라고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다.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30쪽의 결정문을 읽으면서 나는 잠시 서글퍼졌다. 이 단순하고 상식적인 이야기가 왜 게임계에서는 점잖게 일컬어야 ‘논란’으로 취급되고 있을까. 수십조를 넘는 가치를 가진 기업들이 여전히 동네 슈퍼마켓의 상도덕만도 못한 기업윤리로 운영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왜 글로벌한 최첨단 산업이 기괴한 음모론과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덕지덕지 붙여서 억지를 부리는 이들의 말에 휘둘리게 된 걸까.
게임회사가 유니세프나 여성가족부가 될 필요는 없다. 최소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고, 노동법을 준수하고, 상식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사회 정의를 해치지 않는 가운데 돈을 벌면 된다. 이걸 못 하겠다면 기업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게 우리 사회의 약속이다.
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