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일 변호사가 지난 2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80번 환자의 유족들이 국가, 삼성서울병원, 서울대학교병원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재판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 당시 정부의 초기대응 부실은 정부도 인정했고, 우리 사회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것인데 이번 판결은 이러한 사실을 뒤집고 정부에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2015년 목숨을 잃은 메르스 80번째 환자 김아무개(사망당시 35살)씨의 유족인 아내 배아무개(41)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배씨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2심 판결에 대해 <한겨레>에 “한국사회에서 코로나19가 재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감염병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이 이러한 판결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납득할 수 없었다”며 “향후에 대규모 유행병을 정부가 부실하게 관리해 개인이 사망하더라도 피해를 입은 개인의 불운이나 불행 탓으로 돌리고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달 26일 서울고등법원 민사9부(재판장 손철우)는 배씨가 대한민국 정부와 삼성생명공익재단, 서울대병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김씨의 죽음에 대해 정부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고 2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던 1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2014년 악성림프종(암)을 앓았다가 항암치료를 받은 뒤 완전관해(암이 없어짐) 판정을 받았던 김씨는 구토와 고열 증상 등 암 증세가 재발해
2015년 5월27일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같은 기간 응급실을 방문했던 14번째 환자로부터 메르스에 감염됐다. 김씨는 삼성서울병원에서 확진판정을 받고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는 메르스가 완치된 뒤에도 유전자증폭(PCR) 검사 결과가 음성과 양성이 번갈아 나오면서 음압격리병실을 나오지 못했다. 격리병실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시티(CT) 촬영 같은 기본적인 검사를 할 수 없었고, 항암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당시 메르스 방역이 최우선 순위였던 탓에 가족은 병원과 정부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병실 밖에서 발을 구를 수 밖에 없었다.
김씨가 격리병실에 있는데도 질병관리본부는 2015년 7월27일 “마지막 격리자의 격리가 해제됐다”고 발표했다. 이튿날인 7월28일 황교안 국무총리(현 자유한국당 대표)는 “더 이상 메르스 감염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니 국민들도 일상생활로 복귀해달라”며 메르스 국내 유행이 사실상 끝났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김씨는 ‘사실상 종식’ 발표 후에도 3개월을 더 격리병실에 머물렀다. 끝내 김씨는 암이 악화돼 그해 11월25일 격리병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80번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감염자였던 김씨는 어렵게 공부해 치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지만 메르스에 감염된 뒤 채 두 달을 일하지 못하고 악성림프종이 악화돼 목숨을 잃었다. 김씨가 생전에 쓰던 치료 도구들. <한겨레21>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질병관리본부(현재 질병관리청)가 국내 첫번째 환자에 대한 진단을 늦게 하고 역학조사를 부실하게 하는 등 초기대응에 실패한 책임을 물은 1,2심 재판 결과는 각기 다르게 나타났다. 두 재판 모두 정부의 첫번째 메르스 환자 진단이 늦어진 것에 대해선 정부가 책임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김씨에게 메르스를 옮긴 14번째 환자의 감염에 대해선 정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과실과 김씨의 감염·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에 대해 원고 쪽 변호를 맡은 이정일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는 “첫번째 환자와 14번째 환자가 같은 병동, 같은 층에 머물러 감염됐는데 정부가 14번째 환자를 접촉자 범위에 넣고 관리하지 못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판단근거가 명확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유족은 음압격리병상에서 6개월 가까이 격리돼 암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015년 7월 말께 정부는 ‘사실상 메르스 종식’을 선언하면서도 김씨에 대한 격리조치는 해제하지 않았다. 바이러스 유전자증폭 검사 결과가 음성과 양성이 번갈아 나온다는 이유였다.
배씨는 “당시 의료진들은 남편이 감염력이 없다고 판단했는데도 방역당국은 우리 남편의 격리를 해제하지 않았다. 결국 암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배씨는 “남편이 죽은 뒤로도 정부나 병원에서 단 한번 연락이나 사과를 받지 못했다”며 “재판을 통해 억울함을 풀지 못하는 것은 가슴에 대못이 박힌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배씨와 유족은 1,2심 모두에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서울대병원과 삼성생명공익재단은 빼고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서만 상고장을 제출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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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바이러스’ 취급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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