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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예술을 후원하라, 그 돈이 탐욕스러운 너희를 구원하리라

등록 2021-05-22 14:11수정 2021-05-22 15:47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⑧ 부자와 ‘그림 면죄부’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알려진 메디치
당시 멸시받던 고리대금업 하며
실추된 이미지 회복하려 예술 후원
이 가문 레오 10세 정치적 야망에
라파엘로 ‘샤를마뉴의 대관식’ 탄생

또 다른 부자 스크로베니 가문
사설 예배당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
이 과정과 ‘구원’받는 모습 담긴
‘최후의 심판’으로 명예 되찾았으나
‘참회·회개’ 없이 고리대금업 지속
조토, <최후의 심판>, 1305년께, 프레스코,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서쪽 내부 벽.
조토, <최후의 심판>, 1305년께, 프레스코, 이탈리아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서쪽 내부 벽.

바야흐로 갑부들의 압도적인 미담이 사회를 뒤덮는 시대다. 얼마 전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최소 5조원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김봉진 배달의민족 창업자는 재산의 절반인 약 5천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약속을 공표했다.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이들이 기부를 하겠다고 선언한 시점이 묘하다. 김범수 의장의 발언은 자녀들에 대한 대규모 증여 및 케이큐브홀딩스(절세를 위한 페이퍼컴퍼니 의혹을 받는, 사실상 카카오의 지주회사로 평가받는 회사)에 대한 뉴스가 뜬 뒤에 이루어졌고, 김봉진 창업자의 기부 약속은 배달 라이더를 착취한다는 비판이 한창 제기될 때 보도됐다. 어쨌든 기부 규모가 워낙 화끈했기 때문일까. 그들의 부적절한 행위를 둘러싼 비판과 의혹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서양 미술사에도 비슷한 부류의 부자들이 종종 등장한다. 기부자 대신 ‘후원자’라는 이름을 앞세우고서 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후원자는 ‘사람이나 단체, 작품, 예술 등을 뒷받침하거나, 장려하거나, 용기를 북돋는 보호자’에 가깝다. 하지만 미술사 속 후원자들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예술을 후원하며 재력가는 부를 과시했고, 권력자는 가문의 지위 향상과 정치선전을 꾀했다. 또 이를 통해 ‘이미지 세탁’을 하기도 했다.

‘파문의 죄’ 덮은 부자-예술가 연대

그 대표적인 사례가 피렌체 메디치(Medici) 가문의 후원이다. 메디치가는 르네상스 미술을 꽃피게 한 후원자로 이름이 높다. 성당을 지은 뒤 벽화를 주문하고,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등 예술가를 지원했으며, 미술품을 사들이고 수집하는 등 대를 이어 예술 사랑을 실천한 집안, 이것이 바로 우리가 표면적으로 알고 있는 메디치 가문이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메디치 가문의 문화예술 후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메디치가의 사업이었던) 은행업에 대한 사회 전반의 적개심을 의식한 것이었으며 고리대금업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에 환원한 것이었다.” 당시 고리대금업은 가장 멸시받는 직종 중 하나였다. ‘이윤 추구와 이자 소득’은 기독교 교리에서는 파문에 해당하는 죄였기 때문이다. 즉 메디치 가문은 고리대금업을 하며 실추됐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곰브리치가 메디치 가문을 두고 이런 박한 평가를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라파엘로, &lt;샤를마뉴의 대관식&gt;, 세부, 1516~1517년, 프레스코, 바티칸박물관.
라파엘로, <샤를마뉴의 대관식>, 세부, 1516~1517년, 프레스코, 바티칸박물관.

성제환의 책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에 따르면, 메디치 가문의 기초를 다진 인물인 코시모(1389~1464)는 도시 한가운데에 산 로렌초 성당을 개축하면서 신흥세력인 메디치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했다. 이어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1449~1492)는 자신이 후원하는 작가와 화가를 다른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소개하면서 정치적·외교적 기반을 굳혔다.

로렌초의 아들이자 교황인 레오 10세(1475~1521)는 좀 더 노골적이었다. 라파엘로의 그림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후원한 레오 10세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교황 레오 3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대신 그려 넣으라고 지시했다. 레오 3세는 샤를마뉴에게 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수여해 서로마제국을 부활시킨 업적을 남긴 교황이다. 레오 10세는 그림을 통해 대놓고 레오 3세처럼 보이려 한 것이다. 이유가 있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비밀협정을 맺었는데, 이때 프랑수아 1세가 이슬람국가인 오스만제국을 막아주면 비잔티움의 왕관을 씌워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레오 10세는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통해 자신을 레오 3세의 위업을 잇는 것으로 포장한 셈이다. 이를 확증하듯 그림 속 왕관을 받는 샤를마뉴의 얼굴도 프랑수아 1세의 얼굴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림 속 샤를마뉴의 발밑에 있는 소년 시종은 레오 10세의 조카 이폴리토 데 메디치(1511~1535)의 얼굴로 그려냈으니 참으로 꼼꼼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예술품’이 작가의 순수한 창작물이라고 믿는 건 어쩌면 낭만주의적인 착각에 가깝지 않을까.

‘속죄’ 알리고 명예도 회복하고

비단 메디치 가문뿐이었으랴. 돈과 권력은 언제나 예술 주위를 얼쩡거리면서 호시탐탐 예술의 ‘힘’을 이용하려고 애쓰곤 했다. 이탈리아 화가 조토(1266?~1337)의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도 후원자의 ‘노골적 의도’에 의해 탄생한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제목 그대로 ‘최후의 심판’의 현장을 충실히 담고 있다. 정중앙엔 예수 그리스도가 황금빛 후광을 드러내며 앉아 있고, 양옆에는 예수를 수호하듯 열두 사도가 나란히 앉아 심판을 지켜보고 있다. 그림 왼쪽 아래에는 천국행이 결정된 자들이 천사의 인도를 받아 무덤 속에서 나오고 있는 반면, 오른쪽에서는 죗값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불의 강을 따라 사탄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벽화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곳은 이탈리아 파도바에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스크로베니 예배당이 정식으로 교구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곳은 파도바의 최고 부자 가문 중 하나였던 스크로베니 집안의 사설 교회였고, 조토에게 그림을 주문한 사람도 스크로베니 가문의 엔리코(?~1336)였다. 엔리코는 무슨 이유로 사설 예배당을 짓고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조토를 초빙해 <최후의 심판>을 그리도록 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 조토와 엔리코가 살던 당시 은행업, 고리대금업은 가장 냉대받는 직업이었다. 고리대금업자는 ‘돈을 파렴치한 방법으로 취급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곤 했다. 그런 사회 분위기 때문인지 <최후의 심판> 중 지옥의 입구를 묘사한 부분에도 고리대금업자가 등장한다. 하얀색 돈주머니를 목에 걸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바로 고리대금업자다. 엔리코는 아마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 자신이 바로 고리대금업자였기 때문이다.

조토, &lt;최후의 심판&gt; 중 세부. ‘돈주머니를 목에 걸고 추락하는 영혼’
조토, <최후의 심판> 중 세부. ‘돈주머니를 목에 걸고 추락하는 영혼’

스크로베니 가문은 대대로 은행업을 해왔다. 특히 엔리코의 아버지 레지날도 스크로베니는 횡포가 유독 심했다고 알려졌다. 오죽했으면 동시대 시인 단테가 쓴 <신곡> 지옥편에도 레지날도가 등장했겠는가. 단테는 <신곡> 지옥편 제17곡에 “‘살찐 푸른색의 암퇘지 형상’을 새긴 하얀 주머니를 목에 건 자도 보였다. (중략) (그는) 이 피렌체 사람 중에 나만 파도바 사람이오(라고 말했다)”라고 쓰며 레지날도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으로 묘사했다. ‘살찐 푸른색의 암퇘지’는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가문 문장이기에, 당시 독자들은 레지날도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엔리코에겐 이런 비난과 불안을 상쇄할 어마어마한 돈이 있었다. 그는 거액을 들여 예배당을 지은 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다. 그리고 조토에게 자신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배당을 바치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도록 지시했다. <최후의 심판> 속 십자가 옆에는 두 천사의 보위를 받으며 성모 마리아가 서 있는데,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가 바로 엔리코 스크로베니다. 그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을 오른쪽에 있는 성직자의 어깨에 얹어 봉헌하는 중이다. 이에 성모 마리아는 자비를 베풀듯 엔리코에게 손을 내밀고 엔리코는 그 손을 잡으려 왼손을 뻗는다. 그림대로라면 그는 고리대금업의 죄를 씻어내고 구원받을 것이다.

조토, &lt;최후의 심판&gt; 중 세부. ‘성모 마리아에게 예배당을 봉헌하는 엔리코 스크로베니’
조토, <최후의 심판> 중 세부. ‘성모 마리아에게 예배당을 봉헌하는 엔리코 스크로베니’

이처럼 ‘죄와 구원’을 형상화한 조토의 그림 덕분에 스크로베니 가문의 명예는 성공적으로 회복됐다. 그렇다면 엔리코는 이후 고리대금업을 그만뒀을까? 천만에. 조토의 종교화를 후원한 뒤에도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림을 주문한 목적이 참회와 회개가 아니었던 셈이다. 책 <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의 저자 이은기는 조토의 <최후의 심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가문의 속죄도 만천하에 알리고, 자기에게 무덤도 제공하고(엔리코 스크로베니는 예배당에 묻혔다), 천당에도 보내주고, 가문을 명예롭게 했으니 다목적의 사업이었다. 어쩌면 그의 사업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사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가 조토에게 그림을 주문한 덕분에 7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니까.”

한국의 메디치, 삼성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에 흐르는 이와 같은 ‘끈끈한 연대’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그 옛날 왕족, 귀족, 성직자 같은 권력자들의 자리에 기업가가 들어앉은 것 정도다. 오늘날의 기업가들은 메세나(Mecenat)라는 이름으로 문화예술 활동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기부와 후원을 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기업가들이 평소 ‘부자가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에는 그렇게 불편해하면서도, 기부할 때는 납부해야 할 세금보다 더 큰 액수의 돈도 내놓는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뭘까. 손아람 작가는 ‘드물고 아름다운’이라는 제목의 <한겨레> 칼럼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들은 세금을 아까워하는 게 아니라, 납세자로 국가에 동원되었을 때 잃게 될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꿀 ‘아름다운’ 기회 같은 것.” 즉 부자들은 세금 납부를 통해 공적으로 사회적 의무를 하는 데에는 매력을 못 느낀다는 얘기다. 그들은 드물어서 아름다운, 그런 비현실적인 미담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노동자 착취, 협력기업 쥐어짜기, 소비자 기만 등으로 지탄받는 거대 기업이 납세라는 ‘당연한 의무’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부와 후원이라는 ‘폼 나는 자선행위’를 통해 사회적 찬사와 인정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렇듯 기업이 영리사업과 별 관련이 없는 문화 활동에 후원하는 행위는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포장되곤 하지만, 사실은 이를 통해 얻은 평판으로 비판적 여론을 가리고 경제적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자구행위인 셈이다.

얼마 전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 일가가 생전 그가 가지고 있던 문화재와 미술품 약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혀 화제다. 일단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이 컬렉션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전 회장 수중에 모인 것인지는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2007~2008년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특검’ 당시, 삼성 수장고에 있던 그림 수만점이 개인 소유인지 삼성문화재단 소유인지, 무슨 돈으로 산 것인지 등 출처를 제대로 밝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은 삼성에 ‘한국의 메디치가’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칭찬에 호들갑이다. 앞서 살펴봤듯, 메디치 가문이 미술 후원을 했던 가장 큰 목적은 가문의 지위 향상과 정치선전, 이미지 조작을 위한 수단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어떤 의미로는 매우 적절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이건희 컬렉션’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면을 연계 짓는 움직임도 벌써 보인다. 역시 한국의 메디치 가문답다고나 할까.

▶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을 묶어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이번엔 그림을 매개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다양한 층위의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3주에 한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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