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의 여성살이
박어진의 여성살이 /
명동역 1번 출구에서 만나자는 언니의 문자 메시지에 득달같이 네 자매가 모였다. 정확히 말하면 세 자매와 우리들의 올케 소영씨. 두 달에 한 번꼴로 느슨하게 모여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는다. 각자 음식을 만들거나 사와 집에서 모이기도 한다. 여행사 가이드인 막내는 다음주 일본 수학여행단에 대비해 한-일관계사를 총정리하느라 결석. 남산 케이블카 출발지점 앞 계단을 올라 벚꽃 산책로로 진입하며 떠들기 시작한다.
오늘의 톱뉴스는 회사 사보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남동생 이야기. 무슨 상인가를 받아서 상금 30만원과 함께 사보 표지 모델로 발탁되었다니 자매들은 단체로 흥분한다. 언니는 정년퇴직을 앞둔 형부의 퇴직 이후 프로그램 계획을 짜느라 동생들의 아이디어를 모집한다. 나는 기타나 아코디언 같은 악기를 시작하는 게 어떨까 의견을 낸다. 가문의 돌연변이로 등장한 영재급 아들을 둔 여동생, 과외 끝나는 새벽 1시 반에 아들을 태우러 가느라 잠이 부족하다니. 그 불타는 모성애에 우린 말을 잃는다. 언니가 작은 스카프를 하나씩 나눠준다. 모두들 언니에게 받는 데 익숙한 걸 보면 장녀란 역시 하늘이 내리시는 모양. 칼국수를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의 주요 안건인 어버이날 가족 모임 장소와 날짜를 정한다. 언니네가 회를 떠 오고 장소는 우리 집으로 결정. 교통과 여유 노동력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모임이 끝나면 집안의 남자들은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해 아우성이다. 내 남편도 예외가 아니다. 행여 처형, 처제들이나 누이, 처남댁에게 밉보이지 않을까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쓴다. 어느새 자매들의 점심 모임은 집안의 각종 정보가 넘치는 최고 의사소통기구로 부상한 걸까? 형제들 간 의견 대립이나 싸움에 대해 누가 옳고 그른지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는 게 바로 이 점심 모임. 몰리는 당사자는 자기변호 기회를 얻는다. 태어난 순서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언니들에게 대드는 건 우리 집의 빛나는 전통. 콩가루 집안의 언니들은 살짝 불리하다. 하지만 서로 할 말 다하고 사는 구조 덕분에 뒤탈 없이 다시 웃으며 만나게 된다. 자매들에겐 또 하나의 공동 관심사가 있다. 바로 우리들의 조카들, 그러니까 사촌 형제들 간 유대 강화 말이다. 사촌 자매들을 호주 배낭여행에 묶어 보내기도 하고 대학생 형이 고딩 사촌 동생에게 무료로 과외지도를 하는 서비스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 모든 아이디어와 세부 사항이 자매들의 점심 모임에서 구체화된다. 딸이 많아 가문은 평화롭고 명랑하다.
칼럼니스트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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