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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계절변화에 대처하는 자세

등록 2008-05-08 18:24수정 2008-05-08 19:28

박어진/칼럼니스트
박어진/칼럼니스트
2050 여성살이

봄은 단명했다. 모든 어여쁜 것들이 그렇듯이. 봄꽃들의 치열한 미모 경쟁도 끝이 났다. 단 한 줄기 향기만으로 코끝을 아찔하게 하는 연보랏빛 라일락마저 시들었다. 라일락 향기는 왠지 희미한 옛사랑의 향기를 닮았다. 헤어짐의 극렬했던 고통은 시간 속에 휘발해 버린 지 오래. 남은 건 설레임의 순간들뿐이다. 첫사랑의 기억이 없다면 나는 얼마나 가난할까? 라일락 향기 속에 은밀히 웃는다.

올봄의 모든 아침, 연두는 전율이었다. 밤새 연두 빛깔은 소리 없이 바뀌어 아침마다 풍경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쉽게 감동하는 나. 해마다 연두에 더 민감해지는 건 내 삶의 연두시대를 아득히 멀리 지나왔기 때문이겠지. 잃고 나서야, 한참 지나고 나서야 한때 맘껏 누린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건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제 나는 나무들과 꽃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숨기지 않는다. “굿모닝, 자목련! 애썼어요, 벚나무님! 헬로, 제비꽃!” 겨울 추위를 과묵하게 견뎌내고 꽃을 피워낸 그들의 쾌거를 어찌 칭찬하지 않으랴? 아파트 단지 안에 같이 사는 나무들과 꽃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아낌없이 경의를 표현한다.

동네 대모산길을 걷는 즐거움도 이맘때가 최고다. 산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높이라서 내겐 만만한 산길. 어릴 적 불렀던 노래 가사처럼 햇볕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고 오솔길은 고요하다. 놀랍다. 그저 햇볕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이제 나뭇잎들의 빛깔은 연두와 녹색의 경계에 있다. 녹색은 날로 세력을 강화할 것이다. 그렇게 여름은 시작되려니.

내려오는 길목, 농민 아짐씨들이 집 밭에서 기른 얼갈이 배추며 열무에다 상추, 쑥갓, 부추까지 한 보따리씩을 펼쳐 놓고 앉아 있다. 붉은 띠로 허리를 묶인 마트 부추나 열무와는 때깔이 달라 보인다. 덥석 부추, 상추를 사고 밭미나리 한 봉지까지 사들고 내려온다. 집에 오자마자 씻어서 대충 썬 다음, 밥 한 그릇을 부어 넣고 비비기 시작한다. 고추장 한 숟갈에 들기름 두어 방울을 떨어뜨려 입이 미어지게 틀어넣는다. 밭미나리의 쌉싸름한 향내가 입안에 화악 퍼진다. 오, 대모산의 향기! 이제 아카시아가 필 차례다. 꽃들이 피고 지는 덧없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 덧없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맘껏 누려야 하는 것이겠지. 유쾌하게 말이다. 경축, 2008년 초여름!

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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