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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블로그] 한국과 독일의 분만실 풍경

등록 2009-02-06 14:09

나는 한국에서 큰 아이를 낳고 6년 후 독일에서 작은 아이를 낳았다. 독일 병원에서 작은 아이를 낳은 후 큰 아이를 낳았던 때를 생각하며 눈물지었던 일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내가 14년 전 한국에서 첫 아이를 낳을 때만 해도 죽음과 같은 산고를 치러내는 여자들에게 한국 사회는 그리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출산은 여자들에게 당연한 일이었고 누구나 해야 하는 평범한 과정이었다.

대학병원에서는 여러 명의 산모들이 커다란 분만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경쟁이라도 하듯 죽어라 비명을 질러댔다.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들이 가끔 한 번씩 들여다보고 지나가 버리면, 여자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홀로 침대 기둥을 붙들고 사투를 벌여야 했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본능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 참혹한 순간에, 나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함께 보아야 하는 그 처참함이란. 아무리 좁은 공간이라도 칸막이 하나쯤은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과연 누구를 위하여 산모의 인권은 거론될 가치도 없었던 것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첫째를 낳을 때 분만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옆 침대에 나이가 스무 살 정도의 어린 산모가 있었다. 아직 어린 때문인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쉬지 않고 고함을 질러대자 “산모! 혼자 아기 낳아요?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라면서 지나가던 간호사가 인상을 쓰며 면박을 주었다.

아무리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그 장면을 보는 순간 한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바로 막바지 진통이 찾아오는 바람에 열 받을 틈도 없이 나도 그만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말았다. 분만실에 걸어 들어가서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꼬박 24시간을 꼼짝없이 한 침대에 누워 ‘혼자 소리 지르고, 혼자 숨 고르고’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분만대에 올라갔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데 아이를 받는 담당 간호사와 젊은 의사는 지난 밤 파티에서 있었던 일들을 희희낙락 이야기하고 있었다. 분만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 불안을 감출 수 없었지만 아무도 내게 경과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지난 밤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공장에서 라인을 돌리고 있는 생산직 직원들처럼 보였다.

물론 한국 대학병원 분만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 첫 출산의 경험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신성함 보다는 짐승과 다름없이 취급되었다는 느낌마저 들만큼 가볍게 여겨졌었다.

큰 아이 출산 후 한동안 우울증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분만실을 나오니 남편과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할 것 없이 모두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었지만 아무도 진정 나의 고통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고, 남편의 별것 아닌 한 마디에도 서운해 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러나 남편밖에 일가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낯선 독일에서 둘째를 낳았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결국 내 스스로 감내해야할 고통이었지만 그 후에 오는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은 한국에서 느낀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남편이 옆에 있었고, 독방을 쓸 수 있었고, 나 한사람을 위해 의사와 산파, 간호사 등 여러 사람이 함께 해 주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진국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훌륭한 시설과 인력을 제외하고라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독일 의사와 간호사들은 ‘산모’라는 호칭대신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들에게는 기억하기 힘든 동양이름이었을 텐데도 언제 외웠는지 꼬박꼬박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었다. ‘나’는 사라지고 아이 낳는 기계로 전락한 것 같아 불쾌했던 ‘산모’라는 호칭대신 내 이름을 찾아준 파란 눈의 사람들에게서 색다른 정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또한 그들의 친절한 말 한마디다. 이를 악물고 참아보려는 내게 참지 말고 소리를 지르든지 병원을 돌아다니든지 ‘당신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자 안정을 찾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따끈한 차를 타주던 고마움. 노산이라 분만이 쉽게 진행되지 못하자 즉석에서 욕조에 물을 받아 수중 분만을 시도했고, 그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다시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병실을 수도 없이 걸어 다니는 등 정말 요란스러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지 않았고, 함께 힘들어했고, 안타까운 시선으로 지켜보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시도했다. 산모의 고통을 누구보다 많이 보아온 사람들이 주는 위로는 더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산고가 지나가고 아이를 품에 않았을 때의 그 벅찬 감동이란!, 의사와 간호사와 산파와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기쁨은 온전히 모두 내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산후우울증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두 아이를 전혀 다른 환경에서 분만한 내게 한국에서의 산후우울증은 분명 산모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아무런 위로도 없이 홀로 싸워야 했던 그 외로움이 바로 우울증이라는 그늘로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도 한국에 사는 동안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둘째 아이를 낳아 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큰아이를 낳을 때 그 분만실은 내게 얼마나 외로운 공간이었던가를. 그 순간에 듣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될 수 있는가도 새삼 알게 되었다.

한국 병원도 이제 경쟁력이 극심해져서 서비스가 한층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경쟁력 때문에 좋아진 서비스가 아니라 직업의식 있는 의사와 간호사가 더 절실한 것이 한국병원이라는 사실이, 지금은 내가 너무 실정을 모르기 때문에 드는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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