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성희롱 문제는 여성 노동자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다. 젠더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갈수록 예민해지고 있지만, 관련 사건에 대한 처리는 걸음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성희롱은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에 상담을 의뢰한 여성 노동 문제의 절반 이상(56.3%)을 차지한다. 최근 불거진 르노삼성자동차의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왜 이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경우다. 1908년 미국 섬유업종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1만5000명이 10시간 노동제 정착과 작업환경 개선,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궐기한 날을 기념해 만들어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다.
‘성희롱 상사’ 신고하자…“골치 아파진다” 합의 종용 공공기관은 평가 불이익 받아 쉬쉬
“사건발생 아닌 처리결과 반영해야” 지난해 1월 비정규 사무직인 ㄱ씨는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했다. 상사는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것은 물론 ㄱ씨의 엉덩이를 만졌다. ㄱ씨는 회사에 징계를 요청했지만 인사부는 “가해자가 다 인정했고 사과하고 싶다고 하니 징계는 없던 것으로 하자”고 설득에 나섰다. ㄱ씨의 팀장까지 “가해자에게 징계를 내리면 가해자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징계위원회엔 너도 출석해야 한다. 그러면 더 골치 아파질 것”이라고 말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 발생이 확인된 경우 지체 없이 행위자에 대하여 징계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하여야 한다”(14조1항)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그냥 글자일 뿐이다. 르노삼성 성희롱 피해자가 사내 성희롱 고충 처리 상담원에게 문제 제기를 했을 때도 회사의 첫 대응은 “당사자끼리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는 2월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직장 내 성희롱 제도 개선 토론회’에 나와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문가나 중재자도 없이 만나서 해결을 할 수가 있느냐”며 “10년 다닌 회사지만 직접 겪기 전엔 사내에 그런 절차가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이수연 여성인권팀장은 “회사 입장에선 성희롱이 외부에 알려지면 회사의 이미지가 깎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인권·안전정책센터장은 “성희롱에 대한 사용자 책임 강화를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엘림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은 “고용노동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남녀고용평등상 등을 확대해 (성희롱 사건을 제대로 처리한) 기업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가해자에 ‘무늬만 처벌’도 규제 못해…피해자만 분통 가벼운 징계라도 하면 법 위반 면피
“정부가 구체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 대책 없는 솜방망이 징계 성희롱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되레 고용과 근무 여건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대개 ‘솜방망이’ 징계다. 피해자는 더욱더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다. 사업주가 가해자에게 사건의 정도와 관계없이 경미한 징계를 내리더라도 전혀 문제 삼을 수 없다. 여성 노동자에게 “전신 오일 마사지를 해주겠다”거나 “보고 있어도 그립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르노삼성의 50대 팀장은 2주간 정직 및 팀장 보직 해임 징계를 받았다. 남녀고용평등법은 가해자에게 “징계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하라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담지 않았다. 정부의 가이드라인도 없다. 민대숙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는 “사업주가 성희롱 행위자에게 경고를 내린 뒤 고용노동부에 보고하면 법을 위반하지 않은 게 되고, 고용노동부는 성희롱 진정 사건을 종결한다. 르노삼성의 경우에도 회사가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고, 행위자에 대한 제재를 이미 했기 때문에 고용노동부에 성희롱 진정을 했더라도 징계 수준에 대해 규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회사에 처벌 의지가 있어도 어느 수준의 징계를 내려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민우회에는 한 회사 인사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퇴근하는 직원에게 팀장이 ‘같이 가서 자면 안 되느냐’는 말을 해 피해자가 큰 충격을 받았다. 내부 규정에는 성희롱 가해자에 대해 ‘감봉·해고 등에 처한다’고 돼 있는데 어느 정도의 징계를 내려야 하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김부희 고용노동부 여성노동정책과장은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업장에 배포하는 직장 내 성희롱 홍보물 안에 법원 판결이나 중앙노동위원회 결정 사례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반기 안에 실시할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원인 제공” 악성 소문 퍼뜨려 해고하기도 고용부·인권위가 피해 구제 돕지만
사건처리 전문성·접근성 강화 필요 ■ 피해자에게 되레 불이익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징계도 모자라 문제를 제기한 피해 여성에게 인사 등 불이익한 처분까지 내려지면 사건은 산으로 가기 시작한다. 지난해 1월 입사한 지 한달도 안 돼 상사가 잠자리를 요구하고 몸을 만지자 ㄴ씨는 회사에 신고했다. 상사는 자진 퇴사했는데 엉뚱하게도 ㄴ씨까지 해고당했다. 르노삼성 사건에서도 피해자는 “동료에게서 강제로 진술서를 받아냈다”는 이유로 견책 처분을 받았고, 진술서를 써준 동료는 “무단으로 근무시간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정직 1주의 징계를 받았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는 “피해자를 해고하는 것도 문제지만 비공식적으로 피해자 본인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식으로 악성 소문이 날 수도 있고, 왕따를 시키거나 업무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고 가 퇴사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불이익을 구제받기 위해 피해자는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사관이나 근로감독관이 되레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ㄴ씨는 해고당한 뒤 지방고용노동청을 찾아갔지만, 근로감독관은 “그렇게 억울하고 부당하게 잘렸으면 남아서 투쟁이라도 했어야지 왜 아무것도 안 했느냐”며 피해자를 도리어 나무랐다. 민대숙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는 “국가인권위는 전문성은 있지만 사무소가 많지 않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고용노동부는 지역마다 고용노동청이 있어 접근성이 좋지만 근로감독관은 특별히 정해진 분야 없이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업무를 병행해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어렵다. 성희롱 사건은 여러 차례의 조사가 필요하고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만큼 지방노동위원회에 성희롱 판단을 위한 전문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고용부 김부희 과장은 “근로감독관을 보조해 자문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실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성희롱 상사’ 신고하자…“골치 아파진다” 합의 종용 공공기관은 평가 불이익 받아 쉬쉬
“사건발생 아닌 처리결과 반영해야” 지난해 1월 비정규 사무직인 ㄱ씨는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했다. 상사는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것은 물론 ㄱ씨의 엉덩이를 만졌다. ㄱ씨는 회사에 징계를 요청했지만 인사부는 “가해자가 다 인정했고 사과하고 싶다고 하니 징계는 없던 것으로 하자”고 설득에 나섰다. ㄱ씨의 팀장까지 “가해자에게 징계를 내리면 가해자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징계위원회엔 너도 출석해야 한다. 그러면 더 골치 아파질 것”이라고 말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 발생이 확인된 경우 지체 없이 행위자에 대하여 징계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하여야 한다”(14조1항)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그냥 글자일 뿐이다. 르노삼성 성희롱 피해자가 사내 성희롱 고충 처리 상담원에게 문제 제기를 했을 때도 회사의 첫 대응은 “당사자끼리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는 2월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직장 내 성희롱 제도 개선 토론회’에 나와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문가나 중재자도 없이 만나서 해결을 할 수가 있느냐”며 “10년 다닌 회사지만 직접 겪기 전엔 사내에 그런 절차가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이수연 여성인권팀장은 “회사 입장에선 성희롱이 외부에 알려지면 회사의 이미지가 깎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인권·안전정책센터장은 “성희롱에 대한 사용자 책임 강화를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엘림 한국젠더법학회 회장은 “고용노동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남녀고용평등상 등을 확대해 (성희롱 사건을 제대로 처리한) 기업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가해자에 ‘무늬만 처벌’도 규제 못해…피해자만 분통 가벼운 징계라도 하면 법 위반 면피
“정부가 구체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 대책 없는 솜방망이 징계 성희롱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되레 고용과 근무 여건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대개 ‘솜방망이’ 징계다. 피해자는 더욱더 억울함을 호소하게 된다. 사업주가 가해자에게 사건의 정도와 관계없이 경미한 징계를 내리더라도 전혀 문제 삼을 수 없다. 여성 노동자에게 “전신 오일 마사지를 해주겠다”거나 “보고 있어도 그립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르노삼성의 50대 팀장은 2주간 정직 및 팀장 보직 해임 징계를 받았다. 남녀고용평등법은 가해자에게 “징계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하라고 하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을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 담지 않았다. 정부의 가이드라인도 없다. 민대숙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는 “사업주가 성희롱 행위자에게 경고를 내린 뒤 고용노동부에 보고하면 법을 위반하지 않은 게 되고, 고용노동부는 성희롱 진정 사건을 종결한다. 르노삼성의 경우에도 회사가 성희롱 사건을 조사하고, 행위자에 대한 제재를 이미 했기 때문에 고용노동부에 성희롱 진정을 했더라도 징계 수준에 대해 규제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회사에 처벌 의지가 있어도 어느 수준의 징계를 내려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민우회에는 한 회사 인사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퇴근하는 직원에게 팀장이 ‘같이 가서 자면 안 되느냐’는 말을 해 피해자가 큰 충격을 받았다. 내부 규정에는 성희롱 가해자에 대해 ‘감봉·해고 등에 처한다’고 돼 있는데 어느 정도의 징계를 내려야 하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김부희 고용노동부 여성노동정책과장은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업장에 배포하는 직장 내 성희롱 홍보물 안에 법원 판결이나 중앙노동위원회 결정 사례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반기 안에 실시할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원인 제공” 악성 소문 퍼뜨려 해고하기도 고용부·인권위가 피해 구제 돕지만
사건처리 전문성·접근성 강화 필요 ■ 피해자에게 되레 불이익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징계도 모자라 문제를 제기한 피해 여성에게 인사 등 불이익한 처분까지 내려지면 사건은 산으로 가기 시작한다. 지난해 1월 입사한 지 한달도 안 돼 상사가 잠자리를 요구하고 몸을 만지자 ㄴ씨는 회사에 신고했다. 상사는 자진 퇴사했는데 엉뚱하게도 ㄴ씨까지 해고당했다. 르노삼성 사건에서도 피해자는 “동료에게서 강제로 진술서를 받아냈다”는 이유로 견책 처분을 받았고, 진술서를 써준 동료는 “무단으로 근무시간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정직 1주의 징계를 받았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는 “피해자를 해고하는 것도 문제지만 비공식적으로 피해자 본인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식으로 악성 소문이 날 수도 있고, 왕따를 시키거나 업무 능력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고 가 퇴사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불이익을 구제받기 위해 피해자는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사관이나 근로감독관이 되레 피해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ㄴ씨는 해고당한 뒤 지방고용노동청을 찾아갔지만, 근로감독관은 “그렇게 억울하고 부당하게 잘렸으면 남아서 투쟁이라도 했어야지 왜 아무것도 안 했느냐”며 피해자를 도리어 나무랐다. 민대숙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는 “국가인권위는 전문성은 있지만 사무소가 많지 않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고용노동부는 지역마다 고용노동청이 있어 접근성이 좋지만 근로감독관은 특별히 정해진 분야 없이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업무를 병행해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어렵다. 성희롱 사건은 여러 차례의 조사가 필요하고 판단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만큼 지방노동위원회에 성희롱 판단을 위한 전문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고용부 김부희 과장은 “근로감독관을 보조해 자문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실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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