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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치마는 짧게, 구두는 높게…“일터의 복장 규정을 고발합니다”

등록 2020-12-28 04:59수정 2021-01-01 14:04

‘한국판 구투 운동’ 접수된 차별 사례들
박지영 변호사 “옷차림 통제 일터 바꿔야”
‘화난사람들’ 누리집 갈무리
‘화난사람들’ 누리집 갈무리
경기도의 한 백화점 대리주차 지원 부서에서 일했던 여성 ㄱ씨는 온종일 서서 짐을 나르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게 업무였지만 옷차림이 늘 신경이 쓰여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남성 직원과 하는 일은 비슷했지만, 여성 직원의 경우 회사에서 제공하는 치마와 구두를 착용하는 게 규정이었다. 회사에 요구해 유니폼 바지를 받았지만 ㄱ씨가 받은 바지는 남성 직원의 옷과 달리 주머니도, 벨트 고리도 없었다. 헐렁한 바지춤을 조이려 허리에 옷핀을 꽂았으나 수시로 떨어져 바지를 잡고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끝까지 운동화는 회사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실현을 위한 법률 플랫폼 ‘화난사람들’과 함께 하는 박지영 변호사(법무법인 주원)는 지난 18일 ㄱ씨를 대리해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진정을 접수했다. 해당 백화점에서 여성 직원의 용모·복장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선택의 기회를 제한하고 남성 직원과 차별하고 있으니 이를 시정하라는 내용이다. 박 변호사는 지난 2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이 사례를 접하고 ‘화난사람들’과 함께 한국판 ‘구투 운동’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구투 운동’은 지난해 일본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구투는 구두의 ‘구쓰(靴)’, 고통스럽다의 ‘구쓰’(苦痛)와 ‘미투(MeToo)’가 합쳐진 단어다. 배우이자 작가인 이시카와 유미가 트위터에 직장 내 ‘하이힐 금지법’을 만들어달라는 글을 올리고 3일 뒤 2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후생노동성에 청원하면서 여성 차별적 복장 규정을 고발하는 운동으로 확산했다.

한국판 ‘구투 운동’의 제보자 대부분은 20대나 30대 초반의 서비스직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일터에서 머리 스타일, 화장, 옷차림 등을 세세하게 통제받고 있었다. ‘립스틱은 환해 보이는 빨간색 계열로’, ‘손톱은 손님 보다 튀지 않는 살구색 계열로’, ‘머리카락은 망에 넣기’, ‘바지 대신 치마’, ‘치마 길이는 짧게, 구두 굽은 높게’ 따위의 제한이었다.

건강에 영향을 끼치는 사례도 많다. 한 제보자는 “종일 모니터를 보며 일해야 하는 데 안경을 못 쓰게 한다”고 했다. 머리숱이 많은 경우 머리망 무게 때문에 목 근육에 부담이 된다는 호소도 있었다. 한 제보자는 “여름에는 여성 직원에게만 딱 붙는 청바지를 입게 한다. 겨울에는 남자 직원은 롱패딩을 입고 여성 직원은 허리라인이 들어간 숏패딩만 허용돼, 추위를 많이 탄다”고 토로했다.

제보자들은 “복장 제한을 거부했을 때 관리자의 대응도 문제”라고 호소한다. 제보 내용을 보면, “여자가 돼서 화장도 안 하느냐”며 성차별적인 모욕을 주거나 “상사와 단독 면담을 해야 한다”, ‘싫으면 직장을 나가라’고 압박하는 곳들도 있었다.

박지영 변호사. 박 변호사 유튜브 채널 ‘변호사JYP’ 갈무리
박지영 변호사. 박 변호사 유튜브 채널 ‘변호사JYP’ 갈무리
미용실 취업을 알아보던 ㄴ씨는 치마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ㄴ씨는 <한겨레>에 “‘치마를 입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한 후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면접을 하던 분이 ‘그러면 곤란하다’고 했다. 평소에도 활동하기 편한 바지만 입었는데, 여성 직원에게만 치마를 강요하는 건 성차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치마를 거부하고서는 업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ㄴ씨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치마를 입기로 하고 다른 미용실에 취직했다. 그는 “그렇게 입사한 곳에서는 속바지가 붙은 짧은 치마를 유니폼으로 제공했다. 속바지는 짧은 치마보다 훨씬 더 짧아 있으나 마나했다. 그러자 미용실에서는 몸을 숙이면 속옷이 보일 수 있으니 치마 안에 속바지를 하나 더 입으라고 주문했다”고 털어놨다.

이러한 복장 제한은 보는 사람도 부담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있다. ㄷ씨는 최근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한 병원에 갔다가 당황했다고 한다. ㄷ씨는 “병원 직원들이 모두 딱 붙는 상의와 치마에다가 굽 높은 구두, 투명한 스타킹을 신고 있었는데 답답해 보였다. 한 직원은 다리에 온통 파랗게 멍이 들어 있는데도 투명한 스타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 제가 일했던 레스토랑에서도 비슷한 규정이 있었는데, 지금도 여성들에 대한 과도한 복장 규제가 바뀌지 않는 것 같아 씁쓸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ㄱ씨가 운동화를 허용해달라고 했을 때 회사로부터 들은 거절 이유는 ‘대리주차 직원과 백화점 라운지 직원의 복장 규정이 같아 한쪽에만 운동화를 허용해줄 수 없다’는 취지였다. 이는 한쪽에서 변화가 시작되면 다른 쪽도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들이 받는 복장 차별을 바꾸기 위한 활동이지만, 결국 이런 방향이 남성들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극소수지만 회사에서 여성 직원과 달리 남성 직원만 염색을 제한한다는 남성의 제보도 있었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앞으로 복장으로 차별받는 모든 노동자를 위해 추가로 인권위 진정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난사람들’이란?

회원제 법률 플랫폼인 ‘화난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목표로 탄생했다. 라돈검출 대진침대 피해자 공동소송 등이 화난사람들 플랫폼을 통해 진행됐다. 현재는 한국판 구투 운동, 코로나19 확진으로 중등 임용고시 응시를 제한 당한 이들을 위한 공동소송 참여자 모집 등이 진행 중이다.

누리집: https://www.angrypeople.co.kr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angrypeople.co.kr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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