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은 집 안에 펼쳐진 캔버스다. 음식 재료의 색을 내고, 자르고, 볶고, 뿌리고, 뒤집는 과정은 그림을 완성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요리가 곧 회화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색과 형태와 맛을 창조하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방 곳곳에 놓여진 재료와 도구들이 갑자기 아주 새롭게 느껴진다. 프라이팬은 작은 캔버스일까? 파랗고 빨간 양념들은 작은 물감들일까? 식칼과 도마와 작은 숟갈들은 조각을 위한 도구들일까?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치우는 부엌일은 집 안의 그 어떤 일보다 힘들지만, 불 앞에 서서 프라이팬을 움직이고, 재료를 썰고, 접시를 장식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다보면 육체의 피곤을 잊는 희열의 순간이 온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는 ‘이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몸을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완성해 나간다는 ‘자신만의 희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주방의 합리적인 동선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짧게 몸을 움직이며 요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키친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스칸디나비아의 주거 문제 전문가들은 부엌 도구의 적절한 배열과 주방 내 동선을 줄이는 것이 가계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밝혀냈고, 스웨덴의 주방 내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위해 스웨덴 가정연구협회의 연구원을 급파한다. 그 마을은 홀아비가 많이 사는 랑스타드라는 지역이었다. 연구원들은 주방을 움직이는 홀아비들의 동선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절대 말을 걸지 않고, 식사도 함께 하지 않는다. 영화 속의 남자들은 쓸쓸하다. 주방이 자신만의 희열을 위한 곳이라는 가정은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다. 주방에는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해야 한다. 주방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음식을 완성시키는 희열의 공간이기도 해야 하고,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사랑의 공간이기도 해야 한다. 주방이 계속 발전하는 것은, 새로운 스타일의 주방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도구가 발명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주방이라는 캔버스는 ‘희열’과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냄비 여러 개를 한 번에 올릴 수 있어 요리의 능률을 높이는 ‘줄라이’의 핫톱.
서래마을 레스토랑 ‘줄라이’ 오세득 주방장의 ‘무모한’ 주방설계 이야기
서울시 서초구 서래마을에 있는 레스토랑 ‘줄라이’(July)의 주방은 건물 2층에 있다. 2층 전체가 주방이다. 홀이 있는 1층에도 작은 주방이 있고, 3층 한쪽에 냉장실이 따로 있다. 손님들이 앉을 공간보다 주방이 더 큰 셈이다. 이런 주방은 흔치 않다. 식당의 주방은 대체로 전체 면적의 40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주방을 최소화하고 매장의 크기를 극대화해야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다. <건축계획각론>에서는 카페일 경우는 홀의 6분의 1, 서양식 레스토랑일 경우는 홀 6, 주방 4의 비율로 주방의 크기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방은 이보다 작게 설계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줄라이의 주방은 ‘무모한 주방’인 셈이다. 무모한 주방을 설계한 사람은 주방장 오세득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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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매일 아침 이곳으로 신선한 재료가 배달된다. 큰 개수대를 만들어 놓은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큰 생선이나 부피가 큰 재료들을 씻고 손질하려고, 둘째는 큰 개수대에다 여러 도구들을 넣고 소독하려고.
② 이곳에서 재료를 손질한다. 여럿이서 손질할 수 있도록 길게 만들어 두었다. 뒤에는 식기 및 칼 소독기와 냉장고가 있다. 손질한 재료 일부가 냉장고로 들어간다.
③ 핫톱이 있는 조리 공간이다. 두 대의 핫톱이 있으며, 그 아래쪽에는 오븐이 설치돼 있다. 핫톱 아래의 오븐은 잘 쓰지 않는 팬이나 냄비들을 두는 용도로 쓰기도 한다.
④ 주방장의 자리다. 주방장은 이곳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전표를 확인하고 ③에서 일하고 있는 요리사들의 작업상황을 확인하고, 일이 많을 때는 선반에 쌓여 있는 접시를 꺼내주기도 한다.
⑤ 찬 음식을 서비스하는 데 쓰는 작업대다. 벽에는 냉장고가 걸려 있고, 오른쪽에는 정수기와 개수대가 설치돼 있다. 찬 음식 서비스 작업대에서 일하는 요리사는 뒤쪽 선반의 접시를 꺼내 ③에서 만든 요리를 최대한 빨리 나를 수 있도록 돕는다.
⑥ 디저트 작업대다. 줄라이에서는 디저트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디저트 작업대를 따로 만들어 두었다. 디저트를 만들 때는 에어컨을 돌려 작업대의 온도를 최대한 떨어뜨린다.
⑦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층으로 음식을 내려보낸다. 1층에는 작은 주방이 마련돼 있어 마지막으로 음식의 상태를 확인한다. 벽에 붙어 있는 인터폰으로 1층과 연락한다.
⑧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통해 빈그릇을 올려보낸다.
⑨ 식기 세척은 최대한 빨리 해야 한다. 커다란 개수대가 있으며 한쪽에는 식기세척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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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 2억3천만원, 기기에만 1억1천만원
오세득씨가 주방을 설계하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동선이다. 식자재가 어떻게 배달돼 오고, 누가 어느 곳에서 일을 하고, 음식은 어떤 방식으로 내어가야 하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 주방의 크기와 위치를 결정했다.(그림 참조) 다음으로 신경을 쓴 것은 주방도구들이다. 대부분의 도구들은 스테인리스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도구가 없을 경우엔 모두 주문제작을 했다. 그만큼 위생에 초점을 맞췄다. 주걱·소스솥·냄비 등이 모두 스테인리스다.
줄라이의 주방에서 가장 큰 구실을 하는 것은 불판의 일종인 ‘핫톱’(Hot Top)이다. “핫톱 없이 프렌치 요리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얘기할 만큼 중요한 도구다. 그 구조는 간단하다. 냄비 하나를 올려놓을 수 있는 기존의 가스버너와 달리 핫톱에는 냄비 여러 개를 올려둘 수 있도록 무쇠판을 설치해 뒀다. 핫톱이 가장 큰 구실을 발휘할 때는 소스를 만들 때다.
“주문이 한꺼번에 밀려들 때는 여러 개의 소스를 한꺼번에 만들어야 하는데 기존의 버너를 이용하면 불이 모자랄 수밖에 없죠. 핫톱은 작은 냄비를 여럿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에 주문이 밀려도 가뿐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핫톱을 이용하는 주방은 그리 많지 않다. 가격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줄라이에는 핫톱이 두 대 있는데, 합해서 1천만 원이다. 그 가격이면 작은 카페의 주방을 만들 수 있다. 줄라이 주방 곳곳에 있는 기기들의 가격을 듣고 있으면 ‘억’소리가 절로 난다.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믹서 ‘파코 제트’의 아이스크림 보관 용기 하나가 15만원이며, 모든 냉장·냉동고는 붙박이로 제작했다. 이 주방을 만드는 데 2억3천만원이 들었다. 이중 주방기기를 사는 데 1억1천만원이 들었다.
또 한 군데 큰돈이 든 곳이 있다. 바로 방수처리다. 2층에다 주방을 만들다보니 방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에프아르피(FRP) 방수 방식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1층과 2층 사이에 커다란 욕조를 하나 넣어둔 것이다. 2층에서 새어나온 물은 욕조처럼 생긴 방수통을 타고 아래로 흘러나오게 돼 있다. 1층 홀과 연락하느라 음식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으며(둘이 있는데 하나는 음식을 내려보내는 용도이고, 하나는 빈그릇을 올리는 데 쓴다), 연락용 인터폰을 설치했다. 주방과 홀이 나뉘어 있으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닐텐데,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면서, 오세득 주방장은 왜 2층에다 주방을 차렸을까?
주방을 채운 각종 요리 도구들. 동선을 줄일 수 있도록 배치했다.
요리의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다른 친구들이 비싼 차를 살 때 저는 주방에다 ‘재규어’를 사놓은 거예요. 제대로 된 환경을 만들고 싶었어요. 압력조절이 가능한 진공포장기, 블랙박스가 내장된 저울·믹서 겸 볶음기 같은 도구들은 필요 없어 보이지만 요리의 아주 작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리고 주방이 2층에 있어도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줄라이 곳곳에는 각종 요리도구로 가득하다. 한쪽 선반에는 잘 쓰지 않는 도구들이 바구니 속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모든 도구들은 얼마나 자주 쓰느냐에 따라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돼 있다. 세밀하게 액체를 따라낼 수 있는 도구는 첫째 바구니에, 손잡이가 달린 강판은 둘째 바구니에 담는 식이다. 줄라이의 주방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 주방에 들어서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동선으로 이어지고, 모든 위치와 크기에는 이유가 있다. 주방 체계와 음식 맛은 그리 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이 들려주신 ‘음식 맛은 손맛’이라는 이야기가 진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세득 주방장의 노력은 값지다. 그로써 무엇인가 바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오세득 주방장(오른쪽)은 수시로 음식의 조리과정을 확인한다.
글 김중혁 기자
pen@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