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있는 게 창피한 남친의 행동에 헤어지고픈 생각까지…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함께 있는 게 창피한 남친의 행동에 헤어지고픈 생각까지…
제 남친은 생각 깊고 배려 많고 책도 많이 읽고 섬세하며 열정도 있지요. 저는 20대 후반의 여느 여자만큼의 연애 경험이 있고요. 해서 누구나 단점 하나 이상씩은 다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할인마트 시식코너에선 뷔페라도 온 듯 이것저것 집어먹고 몹시 쩝쩝거리며 돌아다니다 동그랑땡 하나 들고 뛰어와 계산대에서 막 지갑을 열고 있는 제 입에 들이대는 남잡니다. 술집에서 안주 필요 없다며 사온 과자 꺼내 먹거나 택시 타면 5분 간격으로 미터기 요금을 읊는다거나 저 보는 앞에서 구강청정제를 뿌린다든가 … 때론 이 남자가 내 남자라니 … 부끄러워 땅 속으로 꺼져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데이트를 하면 연인은 둘째 치고 일행이라는 게 창피스러운 경우가 자꾸자꾸 생기다 보니, 지인들에게는 소개시키기도 싫어지더군요. 그 사람의 사랑과 됨됨이를 감안해 꾹 참고 한번도 내색한 적은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상대적인데 … 있는 그대로의 특성조차 인정하지 못하면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건데 … 창피한 걸 보면 헤어지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 그러기에는 이 사람과 누구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인데 … 어쩌면 좋죠.
A 0. 사연 읽고 한참 낄낄댔다. 하는 꼴이 본인과 하도 흡사해서. 이 사연 채택된 이유다. 하여 오늘은 본인 맘대로, 당신 남친에 감정이입해, 매우 개인적이고 일방적인 이야기 좀 해보려 한다.
1. 고1 어느 점심 무렵. 기말고사 후 일찍 귀가해 부엌부터 뒤졌다. 전자레인지에 밥, 된장찌개 데우고 찬 꺼내는 부산 떨다 마침내 착석 완료. 앗, 근데 수저통이 비었다. 물끄러미 개수통 바라봤다. 설거지 … 귀찮다. 에잇, 오른손, 푸욱, 꽂았다. 밥통에. 뽑아 올린 손, 입안에 밀어 넣었다. 손가락 쭉쭉 빨아 밥풀 제거. 호. 이거 괜찮네. 반찬까지 주섬주섬 하다 아참, 근데, 찌개는. 개수통 다시 3초간 응시. 에라. 이번엔 왼손, 푹 담갔다. 냄비에. 손바닥에 괴는 뜨뜻한 국물. 꺼내 핥아 먹었다. 그때부터 본격 양손 모드. 조몰락조몰락. 아구아구. 뭐냐, 거 해방감이랄까. 묘하게 통쾌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 습성, 내 속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는 거. 맞다, 내게 유전형질 물려준 영장류들, 원래 이렇게 먹었겠구나…
2. 96년, <이경규가 간다>에서 ‘정지선 지키자’ 캠페인 일환으로 일본은 폭주족조차 신호등 지킨다는 방송한 적이 있다. 새벽 4시, 인적 없는 좁은 일차선 도로에 작은 건널목 하나. 바이크 두 대 서행하다 그 적색신호에 정지한다. 이어 터지는 이경규의 감탄과 열변. 와우, 선전문화! 준법정신! 근데 난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가죽에 바이크면 죄다 폭주족이란 설레발에. 뭐가 폭주족이야 쟤네가. 그러다 갑자기, 어, 저 신호등 왜 지켜야 하지, 의문 작열. 신호등, 왜 있나. 차, 사람 충돌치 말라고. 그게 애초 신호등이 발명된 연유다. 근데 신호등이 신호할 게 없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돌발상황 우려할 사각도 없다. 길 전체 전후방이 텅텅 비었다. 이 특정국면서 신호등 존재, 원인무효가 된다. 근데도 안 간다. 신호할 게 없는 신호등이 내 삶을 통제한다. 이런 씨바 … 3. 이제 당신 이야기. 다른 모든 훌륭한 자질에도, 남들에게 소개조차 꺼리게 만드는, 당신 남친이 결여된 그 무엇이, 뭐냐. 우리는 그거 흔히 교양이라 하지요. 언행의 품격. 그가 하는 짓이 당신에겐, 한마디로, 우아하지가 않은 거라. 택시요금 5분 간격으로 읊을 때 - 그게 그냥 습관이든 뭐든 - 남의 영업장에서 깐죽대는 무례와 무식으로 비칠까 싶어 혹은 택시기사에게 몇 천원에도 떠는 남루한 신세로 비칠까 싶어, 싫은 거지. 이해가요. 사람들, 사실 안절부절못하며 일상 살거든. 얕보일까 싶어서. 교양, 그래 탄생한 거거든. 있어 보이려고. 나 무시하지 말라고. 동물들 보호색 입듯. 근데 당신과 남친은 그 위장감각이 안 맞는 거라 지금. 커플에게 그거 곤혹스런 일, 맞지. 혼자 그럴듯한 거 덮어쓰면 뭐해. 옆에서 서 있는 놈이 홀라당, 빨가벗는데.
4. 근데 말이다. 여서부터 본인 일방 주장인데. 사람, 동물이거든. 수저로 먹이 집으며 가오 잡고 산 지 그리 오래 안 됐다고. 애초 지시하던 게 뭔지도 모르게 된 온갖 신호등 죄다 준수하며 사는 거, 삶의 낭비라고. 그럼 어쩌란 거냐. 이거 본인이 자주 하는 이야긴데, 처음 외국 가봐. 온통 다른 것만 보여요. 버스만 타도 다 달라. 토큰, 회수권, 현금, 정기권, 카드 … 다 신기해. 차이점만 눈에 띄지. 그런데 충분히 많은 나라 거치고 나잖아. 그럼 어느 순간, 아, 버스 타면 돈 낸다, 하는 것만 남아요. 인간 사는 곳이면 으레 통하기 마련인 보편 상식. 사람, 그냥 그거 쥐고 살면 돼요. 그거 쥐고, 주눅 들지 않고 액면가로 세상 사는 거, 그렇게 인생 한 마리 행복한 동물로 살 수 있으면, 그게 장땡이라고. 나머진 다 잡소리야. 내 말 한번 믿어봐.
PS - 근데 남친이 본인 주장, 전혀, 못 알아먹는다. 그럼 그냥 촌스런 거거든. 그땐 사육해야지, 뭐.
김어준 방송인
2. 96년, <이경규가 간다>에서 ‘정지선 지키자’ 캠페인 일환으로 일본은 폭주족조차 신호등 지킨다는 방송한 적이 있다. 새벽 4시, 인적 없는 좁은 일차선 도로에 작은 건널목 하나. 바이크 두 대 서행하다 그 적색신호에 정지한다. 이어 터지는 이경규의 감탄과 열변. 와우, 선전문화! 준법정신! 근데 난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가죽에 바이크면 죄다 폭주족이란 설레발에. 뭐가 폭주족이야 쟤네가. 그러다 갑자기, 어, 저 신호등 왜 지켜야 하지, 의문 작열. 신호등, 왜 있나. 차, 사람 충돌치 말라고. 그게 애초 신호등이 발명된 연유다. 근데 신호등이 신호할 게 없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돌발상황 우려할 사각도 없다. 길 전체 전후방이 텅텅 비었다. 이 특정국면서 신호등 존재, 원인무효가 된다. 근데도 안 간다. 신호할 게 없는 신호등이 내 삶을 통제한다. 이런 씨바 … 3. 이제 당신 이야기. 다른 모든 훌륭한 자질에도, 남들에게 소개조차 꺼리게 만드는, 당신 남친이 결여된 그 무엇이, 뭐냐. 우리는 그거 흔히 교양이라 하지요. 언행의 품격. 그가 하는 짓이 당신에겐, 한마디로, 우아하지가 않은 거라. 택시요금 5분 간격으로 읊을 때 - 그게 그냥 습관이든 뭐든 - 남의 영업장에서 깐죽대는 무례와 무식으로 비칠까 싶어 혹은 택시기사에게 몇 천원에도 떠는 남루한 신세로 비칠까 싶어, 싫은 거지. 이해가요. 사람들, 사실 안절부절못하며 일상 살거든. 얕보일까 싶어서. 교양, 그래 탄생한 거거든. 있어 보이려고. 나 무시하지 말라고. 동물들 보호색 입듯. 근데 당신과 남친은 그 위장감각이 안 맞는 거라 지금. 커플에게 그거 곤혹스런 일, 맞지. 혼자 그럴듯한 거 덮어쓰면 뭐해. 옆에서 서 있는 놈이 홀라당, 빨가벗는데.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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