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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탬프가 흐뭇했지

등록 2008-01-23 23:32수정 2008-01-23 23:48

스탬프가 흐뭇했지
스탬프가 흐뭇했지
[매거진 Esc] 여행의 친구들 / 여권
인간들만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사물과도 적당한 관계가 형성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권은 내 친구다. 그것도 십년지기. 지지난해 만든 녀석은 세 번째 친구다. 첫 번째 친구는 어디 여행이라도 간 건지 요즘 통 보이질 않는다. 두 번째 녀석은 안방 서랍장 안에 잠자고 있고, 세 번째는 카메라 가방 근처에서 자주 출몰한다.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내 삶은 얼마나 메말랐을까?

첫 친구를 만나던 때는 지금도 생생하다. 1996년 늦가을 어느 오후, 종로구청 4층에서 녀석을 처음 만났다. 짙은 카키색 외투를 입은,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PASSPORT’라는 금박 글자를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세상 끝까지, 어디든 함께 가겠노라 다짐했다. 그로부터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홀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며칠마다 한 번씩 국경을 넘으며 도장을 채워갔으니까. 몇 개나 늘었나 세어도 보고, 어느 나라 도장이 예쁜지 비교도 해가며 한시라도 우린 떨어지지 않았다. 첫 여행을 계기로 여행하는 게 일이 되면서 우리는 그야말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태평양의 푸른 바다와 동남아의 열대야, 일본의 온천을 우리는 같이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친구를 만나는 동안 우리의 지도는 더 넓어졌고, 추억은 저장 용량이 모자랄 정도로 많아졌다. 덕분에 지구 반대편의 소녀를 사귀기도 하고, 삼총사의 달타냥을 닮은 아저씨와 커플 댄스를 추기도 했다.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고, 가끔 피곤에 눈이 충혈 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즐거웠고, 많이 행복했다.

오랜 친구끼리는 눈빛만 봐도 통한다지만, 오늘은 소리 내어 고백해야겠다. “그동안 고마웠어. 앞으로도 부탁해~”

글·사진 김숙현/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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