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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에서 빛난 ‘미스터 스쿠프’

등록 2008-03-12 22:38수정 2008-03-16 13:45

화염병을 들고 시위를 하는 서울대생(1991.4.24).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피사체에 몰입하고 집중하며” 현대사의 어려운 장면들을 포착해 온 윤석봉
“당신의 사진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로버트 카파가 남긴 이 말은 피사체를 향한 집중과 몰입이 사진가의 덕목임을 말해준다. 한국 사진계에서 윤석봉(67)의 사진이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현장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진가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위 도중 쓰러진 연세대 이한열군의 입관 전 시신앞에서 어머니와 누이 등이 오열하고 있다(1987.7.8).
동아투위 해직이 전화위복으로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한평생을 사진기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1967년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출발해 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됐고, 86년 <로이터> 한국 특파원으로 복귀해 200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30년 이상 카메라를 놓지 않고 현장에서 지냈다. 강한 현장성은 기교가 적으면서도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인물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행동에 몰입했고,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려운 장면을 포착했다.

윤석봉은 “동아투위 사건을 겪지 않고 한국 신문사에 남았다면 사진부 데스크로서 현장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화위복이 됐다”고 말했다. 흔히 국내 언론사에서 사진기자 15년 안팎을 하면 사진 에디터 기능을 하는 데스크를 맡는다. 하지만 <로이터>에서 사진 인생을 바친 그는 예순이 넘어서까지 현장을 뛰어다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진엔 한국 현대사 거개가 담겼다. 69년 홀몸으로 뛰어들어 취재한 흑산도 무장간첩 사건부터 87년 6월 항쟁, 97년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 2004년 고속철도(KTX) 개통까지 없는 게 없다. 또한 그는 청와대 출입기자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다섯 대통령을 기록했다. 그리고 취재하고 돌아올 때마다 ‘물건’을 가져오는 그를 <로이터>는 ‘미스터 스쿠프’(scoop·특종)라고 불렀다. <로이터>는 수차례 그의 특종기를 전 세계 사진기자들에게 팩스로 돌렸다. 윤석봉이 연달아 특종 사진을 건진 이유는 로버트 카파가 그랬던 것처럼 피사체에 몰입하고 집중했기 때문이다. 현장에 포진함으로써 그는 스쿠프를 건질 수 있었다.


한미연합사령부 창설23주년 기념식장에서 유엔기가 의장병의 얼굴을 가리는 순간(2001.11.9).
민주회복국민대회를 저지하려고 출동한 경찰이 대학생 시위대에 포위되어 공격받는 장면(1987.6.10).
제 24회 서울하계올림픽 육상 100미터 금메달리스트 인 캐나다의 벤 존슨이 약물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와 추방되고 있다(1988.9.27).
그의 스쿠프는 87년 6월 항쟁에서 빛난다. 경찰의 방패에 가격당하는 학생, 최루탄 발사기를 빼앗아 부수는 마스크 쓴 시민, 화염병을 던지는 청년의 분노 어린 표정 등 그는 시위대와 전경 속에 섞여 뛰어다녔다.

“사진을 찍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위험한 순간에 시위대 한복판에 서 있다.”

셀 수 없는 화염병이 그의 발밑에서 불탔고, 경찰에게도 부지기수로 맞았다. 지금도 그의 종아리는 화상의 흉터로 어지럽다.

“연세대 앞 철길 둑에 올라 시위 전경을 찍었다. 학생들이 기자들에게 돌을 던졌다. 군부독재에 제 소리를 못 내던 언론에 대한 항의였다. 나는 돌세례를 받으며 시위대 앞으로 내려갔고 당신들의 말을 세계로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설명했다.”

해양훈련 중 한국을 방문한 독일 해군 병사가 최루가스를 마시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1987.6.18).
흑산도에 잠입한 북한 무장간첩을 사살한 뒤 시신과 노획물앞에서 전과를 과시하는 특전사 대원들(1969.6.16).
잊을 수 없는 이한열과 그 가족

그 뒤, 학생들은 화염병을 들고 뛰던 시위대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앉아 있던 윤석봉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군부독재에 재갈 물린 한국 언론과 달리 외국 통신사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윤석봉에게는 아침부터 방독면과 헬멧을 쓰고 나가 한밤에 돌아오는 고된 나날이 계속됐다. 몸무게가 8㎏ 줄었다. 하지만 항쟁을 기록한 사진은 매일 세계로 타전됐다.

윤석봉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87년 6월9일 최루탄에 스러진 이한열 열사와 가족들을 담은 스쿠프를 꼽는다. 한 달 동안의 투병 끝에 숨진 이한열 열사는 수의를 입고 누워 눈을 감았다. 6·29 선언을 앞세워 군사독재는 항복했고, 가족들은 승리를 보지 못하고 떠난 이한열 열사를 고개 숙여 바라보고 있다. 숨진 이한열 열사가 전경으로, 가족들이 후경으로 배치됐다. 사진가와 피사체의 거리는 제로에 가깝다. 가족들이 윤석봉에게만 허락한 ‘단독’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윤석봉(67). 박미향 기자 <A href="mailto:mh@hani.co.kr">mh@hani.co.kr</A>
윤석봉(67).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지난해 윤석봉의 사진 인생을 결산한 사진집 <미스터 스쿠프>(눈빛 펴냄)를 보면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지나간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 단 하나가 빠졌다.

“광주항쟁을 빠뜨린 게 아쉽다. 난 당시 해직기자였기 때문에 광주에 내려가지 못했다. 사진기자로서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광주시민들에게 미안했다. <로이터> 사진기자로 복귀한 뒤, 매년 5월 광주를 찾았다.”

기교 없이 담백한 그의 사진은 메시지가 분명하다. 사진가는 피사체 가장 가까이에 존재했으며, 짧은 거리성은 세밀화를 그려냈다. 단순한 기록매체임에도 사진이 정치적인 매체로 전화하는 이유다. 현장은 메시지를 창조한다.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작품사진 윤석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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