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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아이러니다

등록 2008-05-21 19:18수정 2008-05-22 12:59

〈스카우트〉(2007)
〈스카우트〉(2007)
[매거진 Esc]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칼럼을 쓰기 위해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이하 영국왕)를 보러갔다가 건진 게 없어 난감하던 차에 <스카우트>를 디브이디로 봤다. 두 영화를 이어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음에도 두 작품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꽤 많았다. 그리고 편가르기 좋아하는 성격대로 승부를 가르자면 <스카우트> 완승. 이렇게 재밌는 상업영화가 흥행이 안 된 건 미스터리다. 나부터 극장에 못 갔으니 할 말은 없지만서두. 어쨌든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경기 해설.

두 영화는 역사 코미디다. <영국왕>은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스카우트>는 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다. 비극적 역사에 코미디라니, 안 봐도 아이러니를 담은 희비극임을 알 수 있다. <영국왕>의 디토는 배운 것, 가진 것 없이 시골 호텔에서 프라하의 최고 호텔 직원으로 승승장구하다가 전쟁 통에 백만장자가 됐지만 다시 그 전쟁으로 폭삭 망하고, <스카우트>의 호창(임창정)은 고3의 선동렬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갔다가 대학시절 좋아했던 여자를 다시 만나면서 광주 사태(여기서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보다 광주 사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함을 이해하시길)의 살벌한 현장 한가운데로 휩쓸리게 된다.

코미디 영화 관객의 관점에서 ‘선빵’을 날린 건 <영국왕>이다. 그렇다. 사실 나는 ‘나의 행운은 언제나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광고 카피에 혹했다. 유머하면 또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사고 연발 개그만 한 클래식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주인공의 대사에서 따왔기 때문에 과대광고로 홍보사를 비난만도 할 수 없는 이 카피는 사기였다. 대체로 아니 쭉 주인공은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번 삐끗할 뿐이다. 그것도 나치에 부역했다는, 불행이라기보다는 명백한 잘못으로. 그렇다면 그 잘못은 그의 순진함이 빚은 비극인가? 그렇지도 않은 게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가 골수 나치스트 독일인임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체코인인 자신에게 불편하고 낯선 것임을 인지할 정도는 됐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골 호텔에서 특급 호텔에 올라가기까지 온갖 추한 일들을 감당하고 때로 음모를 꾸밀 만큼 충분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가 아이러니라는 거지?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김은형의 웃기는 영화
반면 <스카우트>의 호창은 스스로 “무개념”이라고 말하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오로지 선동렬을 만나고 선동렬을 꼬드기기 위해 좌충우돌하던 그가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로 가는 건 사소한 선택들의 가느다란 끈이 길게 길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달라붙어 가까스로 마련한 선동렬 부자와의 식사자리를 코앞에 두고 경찰에 끌려가며 ‘계약해야 되는데’만 외쳐대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웃기고 슬프다. 세상이 험악할 때는 야구를 하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도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조차 지뢰가 될 수 있고, 삶은 늘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태세로 곁에 있다. 야구와 연애와 80년 광주라는 생뚱맞은 테마들을 절묘하게 조합해 세공한 <스카우트>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제대로 된 아이러니의 코미디 영화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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