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공예로 만든 문구제품을 판매하는 스웨덴 브랜드 북바인더스디자인의 가로수길 매장.
[매거진 Esc]
아르텍의 암체어와 뱅앤올룹순의 이어폰에 사람들은 왜 열광하는 것일까
6월 초 핀란드 항공사인 핀 에어가 서울과 헬싱키를 잇는 직항 노선을 열었다. 서울에서 10시간도 채 안 걸려 헬싱키에 도착한다니 꿈속의 산타 마을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북유럽이 성큼 가까이 다가온 것 같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북유럽은 헬싱키발 비행기보다 빠르게 생활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노키아와 에릭슨의 휴대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최근 1, 2년 사이 가구, 인테리어, 문구, 전자제품 디자인까지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로 떠올랐다.
가장 큰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
스웨덴에서 온 가구와 생활소품 브랜드 이케아를 비롯해, 여행을 하는 젊은이들의 짐가방을 무겁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의류 브랜드 에이치앤엠(H&M),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여주인공이 전화기를 공짜로 얻어 열광했던 덴마크 명품 전자제품 브랜드 뱅앤올룹슨까지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를 아우르는 스칸디나비아의 브랜드 이름들은 이제 별로 낯설지 않다.
좀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르 알토의 이름이나 덴마크의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의 개미의자 같은 작품 이름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름들에 대한 관심은 실제 판매로도 이어진다. 알바르 알토가 1935년 설립한 디자인회사 아르텍의 제품을 3년 전부터 정식 수입하는 가구 브랜드 인노바드 마케팅팀의 이재영 대리는 “알바르 알토의 암체어가 아르텍의 대표 작품이긴 하지만 높은 가격대 때문에 구매가 쉽지 않은 소비자들에게 10만원대 후반에서 20만원대 초반의 스툴 구매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고 말했다.
1998년부터 코오롱에서 수입하기 시작한 뱅앤올룹슨의 매출은 지난해 전년도에 비해 42%나 올라갔다. 2천만원이 넘는 고가 텔레비전과 홈시어터의 판매가 전체 매출의 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알루미늄과 고무 소재의 세련된 디자인에 기능성을 접목한 20만원대의 이어폰도 입맛 까다로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많이 팔린다. 4, 5년 전부터 인터넷 판매를 통해 보급되면서 지금은 파주 등에 대규모 오프라인 매장까지 연 이케아는 세련된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으로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브랜드가 됐다.
수천만원대의 고가 가구나 전자제품에서 2천원짜리 유리컵까지 스칸디나비아산 제품들의 디자인을 하나로 엮는 가장 큰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이다. 알바르 알토의 대표적 작품인 암체어만 보더라도 나무를 휘어 손잡이와 다리를 하나로 연결한 단 하나의 부드러운 곡선이 의자의 형태를 만든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자리잡은 스웨덴 문구 브랜드 북바인더스디자인에서 판매하는 앨범이나 노트들 역시 견고한 네모 형태 외에 별다른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순식간에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싫증이 나지 않는 담백함이 느껴진다. 40년대 완성된 암체어의 디자인이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생산되고 있고, 북바인더 역시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디자인의 제품이 전세계에 팔리는 건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한 예다. 친환경적 천연소재 활용하는 ‘북바인더스’ 단순함은 1920년대 기능주의와 1930년대 모더니즘이 탄생시킨 북유럽 디자인의 실용성과 연결돼 있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에 영향 받은 북유럽 디자인의 단순함이란 그저 깔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건의 쓰임새를 극대화하고 기능을 떨어뜨리는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함으로써 완성된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삼성과 합작해 프리미엄 휴대폰의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던 뱅앤올룹슨이 산업디자인의 교과서로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첨단기술과 디자인이 유기적인 관계로 결합되어 왔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제품 본연의 기능을 압도하지 않는다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철학은 겉치레를 중요시 않는 북유럽 사람들의 기질과도 맞물린다.
마지막으로 최근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 관심을 두는 이유 중 하나는 전지구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친환경성 때문이다. 슬로 푸드나 슬로 시티를 넘어 슬로 디자인이라는 말까지 등장한 요즘, 일찍부터 자연과 일상을 디자인의 소재와 주제로 삼으며 수공업적 장인 정신을 이어가는 북유럽의 디자인 작업들이 주목받는 건 당연해 보인다. 디자이너의 이름을 건 작품들만 수공업적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북바인더스디자인의 모든 문구류는 친환경적인 천연 소재를 활용해 전문 제본 기술자들이 손으로 완성한다. 1927년 창립자가 고급 바인더를 박물관에 납품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소재와 방식으로 핸드메이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 알바르 알토의 아르텍은 2007년 세계적 가구 디자이너 톰 딕슨과 함께 흥미로운 재활용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대에 생산 판매된 뒤 집 안에서, 또는 창고나 공장에서 오랫동안 사용됐던 의자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추적해 재구입한 뒤, 낡은 의자를 그대로 중고품 컬렉션으로 내놓은 것이다. 대신 각각의 의자에는 이 의자가 탄생하고 살아온 역사를 기록한 칩을 붙여 새로운 구매자가 그 내용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칠이 벗겨지고 눌린 흉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중고 의자들은 스타일 면에서뿐 아니라 사전적인 의미에서도 요즘 트렌드인 ‘빈티지’에 대한 정확한 구현이었던 셈이다.
낡은 의자에 역사를 기록한 칩을 붙이다
최근 몇 년간 산업과 분야를 막론하고 디자인계의 최전선에서 유행어처럼 사용된 에코 디자인, 미니멀리즘, 빈티지 등의 단어와, 유행과는 동떨어지는 자리에서 반세기 넘게 자신의 원형을 고집해온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이 맞아떨어졌다는 건 흥미로운 아이러니다. 그래서 ‘요즘 뜨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한 게 아름답다는 텍스트가 아니라 남들이 트렌드를 따라가려고 허우적거릴 시간에 나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는 게 남는 장사라는 콘텍스트적인 의미에 좀더 가까워 보인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인노바드, 뱅앤올룹슨, 이딸라 제공
(시계방향) 알루미늄과 고무로 만든 뱅앤올룹슨의 이어폰 A8. 20만원대의 가격으로 젊은 소비자들이 선호한다. /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올리던 엘피 시절의 감성을 담은 시디플레이어 베오사운드 9000은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뱅앤올룹슨의 대표상품이다. /
북바인더스디자인에서 생산하는 바인더처럼 단순한 형태와 경쾌한 색감은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의 특징이다. /
핀란드의 호수 형태를 디자인의 모티브로 삼은 알바 알토의 사보이 꽃병.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올리던 엘피 시절의 감성을 담은 시디플레이어 베오사운드 9000은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뱅앤올룹슨의 대표상품이다. /
북바인더스디자인에서 생산하는 바인더처럼 단순한 형태와 경쾌한 색감은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의 특징이다. /
핀란드의 호수 형태를 디자인의 모티브로 삼은 알바 알토의 사보이 꽃병.
수천만원대의 고가 가구나 전자제품에서 2천원짜리 유리컵까지 스칸디나비아산 제품들의 디자인을 하나로 엮는 가장 큰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이다. 알바르 알토의 대표적 작품인 암체어만 보더라도 나무를 휘어 손잡이와 다리를 하나로 연결한 단 하나의 부드러운 곡선이 의자의 형태를 만든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자리잡은 스웨덴 문구 브랜드 북바인더스디자인에서 판매하는 앨범이나 노트들 역시 견고한 네모 형태 외에 별다른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순식간에 보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싫증이 나지 않는 담백함이 느껴진다. 40년대 완성된 암체어의 디자인이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생산되고 있고, 북바인더 역시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디자인의 제품이 전세계에 팔리는 건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한 예다. 친환경적 천연소재 활용하는 ‘북바인더스’ 단순함은 1920년대 기능주의와 1930년대 모더니즘이 탄생시킨 북유럽 디자인의 실용성과 연결돼 있다. 독일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에 영향 받은 북유럽 디자인의 단순함이란 그저 깔끔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건의 쓰임새를 극대화하고 기능을 떨어뜨리는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함으로써 완성된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삼성과 합작해 프리미엄 휴대폰의 디자인을 선보이기도 했던 뱅앤올룹슨이 산업디자인의 교과서로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첨단기술과 디자인이 유기적인 관계로 결합되어 왔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제품 본연의 기능을 압도하지 않는다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철학은 겉치레를 중요시 않는 북유럽 사람들의 기질과도 맞물린다.
(왼쪽)소나무 물결처럼 디자인한 아르텍사의 목재 스크린.
(오른쪽)10만원대면 살 수 있는 아르텍사의 스툴은 요즘 인기있는 가구 종목 가운데 하나다.
(오른쪽)10만원대면 살 수 있는 아르텍사의 스툴은 요즘 인기있는 가구 종목 가운데 하나다.
(왼쪽)나무를 단순한 소재로 활용하지 않고 구부려 디자인적 요소를 만들어낸 알바 알토의 암체어.
(오른쪽)핀란드의 국민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였던 알바 알토(1898-1976)와 예술적 파트너였던 아내 아이노 알토.
(오른쪽)핀란드의 국민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였던 알바 알토(1898-1976)와 예술적 파트너였던 아내 아이노 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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