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에 출판된 헤럴드 렌치의 <장화 신은 고양이>
[매거진 esc]
어른도 즐기는 공학적인 예술품, 로버트 사부다가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팝업북의 세계
어른도 즐기는 공학적인 예술품, 로버트 사부다가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린 팝업북의 세계
‘모든 카드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앨리스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앨리스는 한편으로는 겁나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서 작게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쳐서 떨어뜨리려고 팔을 휘저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꿈 장면이다. 이 장면을 감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활자에 눈을 맡기면서 카드들이 하늘로 솟구치는 풍경을 떠올릴 수도 있고, 존 테니얼이 그린 아름다운 원작 삽화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한다면 120장의 카드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놀라운 풍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로버트 사부다의 팝업북을 통해서다.
14·15세기엔 해부학·천문학 등에서 사용
2차원 평면에서 3차원의 그림이 튀어나오는 팝업북은 그림책의 또다른 세계다. 종이 탭을 당기면 그림이 바뀌는 식의 단순한 변형 기법은 아동용 도서에 널리 쓰이지만 사부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처럼 예술과 공학 디자인이 절묘하게 궁합을 이룬 팝업북들은 어른들의 눈을 홀리기에도 충분하다. 두 책을 번역해 출간한 넥서스주니어가 최근 내놓은 사부다의 <나니아 연대기> 팝업북 역시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잘 만들어진 팝업북은 예술작품으로까지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말 사부다의 작업 파트너인 매슈 라인하트가 제작한 <스타워즈> 팝업북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공학적 완성품을 (그저) ‘팝업북’이라고 이르는 것은 중국 만리장성을 칸막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표현으로 극찬했다.
책장을 덮으면 네모난 책에 불과하지만 책장을 펴는 순간 거대한 성이나, 겹겹의 꽃다발, 깊은 우물까지도 튀어나오게 하는 팝업북의 기술은 ‘페이퍼 엔지니어링’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까다로운 공학적 기술이 요구되는 일이지만 그 역사는 책의 역사와 비슷할 정도로 길고 풍부하다. 재미있는 건 ‘페이퍼 토이’ 또는 토이북이라고도 불리며 장난감처럼 즐기는 최근의 팝업북과 달리 14, 15세기 원시적 형태의 팝업북들은 해부학이나 천문학 등에서 학술적으로 먼저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겹쳐진 종이를 들어올리면 숨겨졌던 신체의 일부가 드러나는 식으로 쓰였다. 19세기가 지나면서 비로소 팝업북은 교육용이나 재미를 위한 기능을 가진 그림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장난감 수집가이면서 빈티지 팝업북 마니아인 배용태·성미정 시인 부부가 최근 써낸 <나는 팝업북에 탐닉한다>(갤리온)는 19세기부터 지금까지 팝업북의 변천사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책에 소개한 희귀본 팝업북들을 소장한 배씨는 “팝업북이라는 표현보다 무버블(movable)북이라는 표현이 좀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초창기 팝업북들은 지금처럼 3차원 입체보다 탭 등을 이용해 그림을 바꾸는 식의 만화경 같은 변형을 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배씨가 외국에서 어렵게 구한 빅토리아 시대의 무버블북인 에른스트 니스터의 <서프라이즈 픽처북>은 둥근 원판 가장자리에 있는 끈을 돌리면 그림이 회전하면서 밑에 있던 그림들이 나타나 윗그림과 교차된다. 유아용 책에 많이 쓰이는 베네치안 블라인드 기법(탭을 당기면 블라인드가 움직이듯이 종이가 움직이며 그림이 바뀌는 방식) 역시 19세기에 개발돼 지금까지 쓰이는 입체 방식의 하나다.
체코 일러스트레이터 쿠바슈타의 기여 2차원 평면이 움직이던 무버블북에서 지금처럼 3차원으로 튀어나오는 팝업북으로 발전한 것은 30년대에 팝업북의 대중화가 이뤄지면서부터다. 팝업북의 상품성을 간파했던 영국의 편집자 루이스 기로드와 미국의 해럴드 렌츠는 부르주아 자제들의 귀한 놀잇감이었던 팝업북을 동네 잡화점까지 퍼뜨리는 데 공헌한 인물들이다. 30년대 날개 돋친 듯 팔리다가 시큰둥해진 팝업북은 60년대 다시 세계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를 책 맨 뒷장에 놀랍도록 거대하고 화려하게 펼쳐 세움으로써 오늘날의 팝업북 표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 체코 일러스트레이터 보이테흐 쿠바슈타의 힘이 컸다고 배용태씨는 설명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현대의 팝업북을 말하기 위해서는 로버트 사부다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마흔네 살인 이 젊은 작가는 2000년 <뉴욕타임스> ‘올해의 베스트셀러’에 오른 <오즈의 마법사>에 이어, 2003년 영국에서 전년도 출간된 최고의 그림책에 시상하는 케이트 그리너웨이상을 받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여느 때보다 화려한 팝업북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진일보한 페이퍼 엔지니어링 기술로 완성해 보는 이를 경탄하게 만드는 두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팝업북으로, 많은 독자들을 팝업북의 세계로 안내하는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한다.
직접 만들어 보는 대중강좌도 생겨
최근에는 사부다의 인기와 함께 팝업북 구매뿐 아니라 초보적인 수준의 팝업북 제작을 직접 시도하는 이들도 는다. 공방이나 문화센터의 북아트 강좌에서 팝업북 제작법을 강의하며 인터넷을 통한 팝업북 제작 정보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팝업북에 관한 가장 많은 정보는 로버트 사부다의 홈페이지(www.robertsabuda.com)에 가면 찾을 수 있다. 사부다와 그의 작업 파트너인 라인하트의 작품들뿐 아니라 전세계의 다양한 팝업북과 팝업북 만들기 과정 동영상, 실제로 따라해 볼 만한 팝업북 매뉴얼 등이 알차게 담겼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출간된 무버블북. 원판 가장자리 끈을 돌리면 그림이 바뀐다.
현대적인 팝업북의 아버지로 꼽히는 쿠바스타가 책 안에 재현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
빈티지 팝업북 수집가 배용태, 성미정 부부가 소장 작품을 중심으로 팝업북의 미학과 역사를 소개하는 <나는 팝업북에 탐닉한다>
체코 일러스트레이터 쿠바슈타의 기여 2차원 평면이 움직이던 무버블북에서 지금처럼 3차원으로 튀어나오는 팝업북으로 발전한 것은 30년대에 팝업북의 대중화가 이뤄지면서부터다. 팝업북의 상품성을 간파했던 영국의 편집자 루이스 기로드와 미국의 해럴드 렌츠는 부르주아 자제들의 귀한 놀잇감이었던 팝업북을 동네 잡화점까지 퍼뜨리는 데 공헌한 인물들이다. 30년대 날개 돋친 듯 팔리다가 시큰둥해진 팝업북은 60년대 다시 세계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를 책 맨 뒷장에 놀랍도록 거대하고 화려하게 펼쳐 세움으로써 오늘날의 팝업북 표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 체코 일러스트레이터 보이테흐 쿠바슈타의 힘이 컸다고 배용태씨는 설명한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팝업북인 로버트 사부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팝업북으로 재탄생한 <나니아 연대기>. 최근 한국에서 발간됐다.
팝업북은 제품이나 회사, 전시회 등의 카탈로그로도 활용된다. 지난해 니만 마커스 백화점 100년을 기념해 한정판으로 제작된 대형 팝업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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