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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폐이발소에서 울다

등록 2008-09-17 21:34수정 2008-09-19 09:51

[매거진 esc] 여기자 K의 숨기고 싶은 이야기
수습 때야말로 연애 걸기에 적기다. 내 처량한 처지가 바로 네 처지이니 “힘들지” 하며 어깨 몇 번 토닥거려 주면 팍 넘어왔을 듯하다. 그때는 어려 미처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좀 혼나고 말지, 쓸데없이 선배 눈치 보다 평생 양식이 될 작업은 꿈도 못 꿨다. 내 머리는 떡지고 발바닥은 새카맸다. 발 냄새도 심해 회식 때 참지 못한 팀장이 콕 집어 누구 나가라 그럴 수도 없어 모두에게 “냄새 없애게 담배를 피워 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선배가 쪼건 말건 밤마다 얼굴에 팩하고, 수습 중 가장 멋진 놈이 피곤해할 때 필사적으로 어깨를 내주고야 말겠다.

사소한 위로, 타이밍만 맞추면 괴력을 발휘한다. 수습으로 배치된 지 일주일도 안 돼 생애 첫 오보를 날려버렸다. 한자를 잘못 읽어 부음 기사에서 이름을 틀리게 썼다. 칼바람이 치는 아침, 팀장이 “너 때문에 엉뚱한 사람 죽은 게 됐다”고 혼쭐냈다. 내가 회사 말아먹은 줄 알았다. 경찰서 식당에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국으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때 식당 영양사 언니가 물 한 잔 건네며 옆에 앉더니 말했다. 수습기자였던 신랑을 이 경찰서 식당에서 만나 위로해 주다 결혼하게 됐는데, 남편을 보니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 모두 다 지나가더라고…. 따지고 보면 별말도 아니었는데, 그때는 사무치게 고마워 처음 보는 영양사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었다.

밥 한 공기의 위무, 얼마나 뭉클한지 겪어본 사람은 안다. 서울 테헤란밸리 근처 퇴폐 이발소가 성업 중이니 어떤 손님들이 얼마나 오는지 알아보라고 지시를 받았는데, 취재가 될 리가 없었다. 인간이 궁지에 몰리면 별짓을 다 하게 되나 보다. 새벽 2시에 한 업소에 들어가 가출 청소년이라고 말해 버렸다. 맏언니가 꼬치꼬치 묻자 테헤란밸리 근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사장이 여기로 가 있으라고 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막 술술 나왔다. 땟국이 잘잘 흐르는 내 얼굴을 보고 언니는 믿어 버렸던지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라는 둥 사장을 조심하라는 둥 조언했다.

사장이 부른다며 업소를 빠져나온 뒤 아침이 오자마자 선배에게 보고를 했는데 지시 내용 중에 알아낸 건 하나도 없었다. “기자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말하는 거야. 다시 가.” 억울하고 분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 또 가는 수밖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내 설움에 겨워 소파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울기 시작했다. 눈치만 살피던 업소 언니가 조용히 수건을 가져다 줬다.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냉혹한 선배를 떠올리며 한참 꺽꺽거리는데 언니가 말했다. “밥은 먹고 다니니?” 그날 퇴폐 이발소 뒤쪽 부엌에서 된장국에 밥 말아 먹었다. 홀에서는 내가 어린 줄 알고 취직시키고 싶어 하는 주인과 “저런 애를 어디다 쓰려고 그러냐”고 따지는 언니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와중에 입에 우걱우걱 밥을 밀어넣으며 생각했다. 퇴폐 이발소에도 인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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