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매거진 esc] 김도훈의 싱글 라이프
와인을 소재로 한 소설을 소개하는 글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185㎝의 키, 렉서스를 몰고 5개 국어를 구사하는 항공 관제사, 와인을 즐기는 독신남.’ 캬아, 이런 로망이라니. 문제는 이런 로망을 따르기에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나도 두껍다는 거다. 일단 185㎝의 키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렉서스. 미친 척 할부로 살 수도 있지만 집 팔고 차 안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5개 국어. 영어만으로도 충분히 머리 아프다. 한 가지 정도는 따라 할 수도 있겠지 싶었다. ‘와인을 즐기는 독신남’ 말이다. 확실히 근사하다. 소주를 즐기는 독신남보다는 말이다.
집 근처 마트에서 와인을 몇 병 샀다. 라벨에 샤토니 어쩌니 하는 프랑스말이 근사하게 찍혀 있는 와인들만 골랐다. 한 병을 깠다. 우아하게 와인잔에 따랐다. 향을 음미했다. 달콤한 포도 향이 코끝으로 올라왔다. 와인잔의 다리를 잡고 한 모금 들이켰다. 시다. 떫다. 쓰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나는 준비한 치즈를 입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내가 즐겼던 유일한 와인은 -이걸 와인이라고 일컬어도 된다면- 캘리포니아산 칼로 로시 상그리아다. 웰치스 포도주스처럼 달착지근하고, 코르크 마개도 없이 돌려서 따고 닫는 바로 그 와인 말이다. 이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알코올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저항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화이트 초콜릿 모카에다 설탕을 두 스푼이나 타서 먹을 만큼 단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보통 와인의 시고 떫은 맛을 견뎌내지 못한다. 처음 와인을 마신 날 나는 정체불명의 시커먼 액체가 썩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와인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드라이’한 맛이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러나 나는 매번 와인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이게 다 <신의 물방울> 때문이다. 내 주변의 거의 모두가 와인을 마실 줄 알며, 그들 대부분은 <신의 물방울>을 읽는다. 나도 <신의 물방울>을 읽는다. 이유는 좀 다르다. 와인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웃고 싶어서다. 천재 소믈리에 주인공은 와인을 입에 살짝 대더니 “기타와 드럼 연주에 휩싸인 달콤하고 허스키한 프레디 머큐리 목소리 같다”고 말한다. 머큐리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낄낄 웃는 것 같다.
이 모든 와인 유행에 가장 크게 짜증이 났던 순간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데뷔하기 전 원더걸스 같은 맛”이라는 와인 평을 발견했을 때였다. 나는 낄낄 비웃으며 냉장고에서 하이네켄을 꺼내 꼴깍꼴깍 목으로 넘기고는 생각했다. 아하, 이건 자이언츠의 이승엽이 투런 홈런 두 방을 쏘며 1군으로 복귀하기 직전의 맛이군. 그리고 나는 와인을 마시는 근사한 독신남에 대한 모든 환상을 머릿속에서 날려버렸다.
김도훈〈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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