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중산간에 솟은 새별오름은 바람이 유난히 세다.
[매거진 esc] 절벽 위를 걸으며 바다와 숲을 함께 즐기는 1박2일 자연주의 제주 여행
원래 이 여행 일정은 지난 11월 말 ‘한국관광공사와 함께하는 esc 투어’를 위해 짠 것이었다. 한국관광공사와 한겨레 마케팅팀 그리고 여행사 투어버스가 어떻게 하면 친환경적이고 효율적인(이런 형용모순이 있을까)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이 일정이었다. 참가자들의 만족도가 높았고, 모범적인 제주 1박2일 여행이 될 것 같기에 소개한다. 올겨울 제주는 이 일정으로 떠나보시길.
화순해수욕장 해변은 색채의 낙원
용왕은 말 그대로 용왕이고, 난드르는 너른 들이다. 용왕난드르마을, 그러니까 용왕이 사는 너른 들에 사람이 산다는 얘기다. 용왕난드르마을엔 이 밖에도 제주 사투리가 작렬한다. 마을 서쪽의 대평포구를 굽어보는, 우람한 130미터 수직절벽 박수기정. 박수는 바가지, 기정은 절벽(강원도 말로는 뼝대 정도 되겠다)이다.
바가지 절벽을 우회해 올라가는 완만한 고개를 주민들은 ‘몰질’이라고 부른다. 몰은 말, 질은 길, 그러니까 말길이다. 고려 중엽, 박수기정 정상에는 말이 살았다. 그 말을 몰질을 통해 바닷가로 부려 원나라로 보냈다. 박수기정에 오르는 길이 또 하나 있는데, 조슨다리다. 몰질과 달리 절벽을 기어오른다. 어차피 마을 사람들도 읍내 화순으로 나가려면 박수기정을 넘어가야 했는데, 옛날 옛적 기름장수 할머니가 좀더 빨리 가려고 절벽을 오르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은 정으로 돌을 쪼아서 길을 만들었다. 그래서 조슨다리다.
조슨다리를 포기하고 몰질을 걸어 올랐다. 숨을 헉헉대며 몰질을 따라 박수기정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곳에 숲의 지평선이 펼쳐질지는 몰랐다. 그건 마치 호남평야에서 진안고원에 올라갔을 때의 느낌과 같다. 구불구불한 아흔아홉 고개를 어지럼증이 나도록 올라서 산꼭대기 부근에서 터널을 통과했는데, 어이없게도 펼쳐지는 평원. 박수기정의 정상은 소나무 우거진 너른 들이다.
하이라이트는 여기서 시작된다. 제주올레 제9구간인 이 길은 해안 절벽을 따라 화순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왼쪽에는 푸른 태평양이 펼쳐진다. 오른쪽은 심연처럼 깊은 숲이다. 길은 평탄한 흙길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데면데면하게 뺨에 부딪친다. 흙길은 남제주화력발전소로 꽂히듯 내려가 아스팔트길로 바뀐다. 여기서 화순 선사유적지를 둘러보고 화순선주협회를 지나면 화순해수욕장이다. 화순해수욕장 해변은 색채의 낙원이다. 특히 초겨울 해가 질 즈음의 흑사장과 남색 바다 그리고 누런 햇빛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해수욕장을 떼지어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마치 지구에 불시착한 이들 같다. 외계인들과 함께 갯바위 지대를 통과하고 다시 모래밭을 지나 산방산 어귀에 다다랐다. 용왕난드르마을에서 여기까지 넉넉잡아 세 시간 걸린다. 이튿날은 용왕난드르마을에서 지냈다. 이즈음 마을에선 계절감각이 둔해진다. 이 지역 특산물인 마늘 밭이 푸르고, 마을을 뒷산 군산오름도 푸르고, 박수기정 절벽에 매달린 소나무도 푸르다. 제주도 남쪽이라 매서운 겨울바람도 한풀 꺾였다. 오전은 마을 올레(골목)길을 산책했다. 총총히 올린 제주 돌담, 돌담 위로 뻗은 들국화, 들국화 뒤로 팔랑거리는 억새.
마을에는 카페 두 곳이 있다. 두 달 전 영화 <거짓말>의 장선우 감독이 내려와 카페 ‘물고기’를 열었다. 장 감독은 마당에 나와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 앞에서 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대평포구 옆의 ‘레인보우’. 월미도나 미사리 카페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마을과 카페는 서로의 풍경을 침공하지 않고 어울려 스며든다.
마을에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밥집이 있다. ‘용왕난드르 향토음식점’은 강된장비빔밥과 보말(바닷고둥의 일종)수제비를 내놓는다. 강된장비빔밥은 마늘을 재배하는 주민들이 개발했다. 김순실 용왕난드르마을 사무장은 “집된장에 마늘과 버섯과 나물 등을 넣고 끓여 마늘의 자극적인 맛을 없앴다”고 설명했다. 강된장의 맛은 자장면 같기도 하고 된장 같기도 하다.
마을 풍경에 스며든 작은 카페들
돌아오는 길에 설록차 재배단지인 오설록과 중산간의 오름인 새별오름에 들렀다. 오설록은 녹색이고 새별오름은 은빛이다. 새별오름은 서부산업도로를 타고 제주시로 가다 보면 애월읍 봉성리 왼편에 샛별처럼 우뚝 서 있다. 해발 519미터.
새별오름은 유난히 바람이 세다. 새별오름이 제주의 모든 곳에 바람을 내뱉고, 제주의 모든 바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오름의 입술에서 억새는 쉴 사이 없이 흔들린다. 정상까지 오르내리는 데 30분이면 족하다.
빛은 겨울에 사멸하지만, 겨울 제주의 빛은 살아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는 사시사철 색이 바래지 않는 곳이다.
해넘이는 산방산에서
쫀쫀하면서도 넉넉하게 짜본 겨울 제주 여행 1박2일 코스
⊙ 첫날
10:40 | 김포공항에서 출발한다. 제주항공이 다른 항공사에 비해 저렴하다. 평일 5만8800원, 금~일 6만7600원. 대한·아시아나 항공은 평일 7만3400원, 금~일 8만4400원. 공항이용료·유류할증료 제외.
11:45 | 제주공항에서 95번 고속화도로를 타고 중문 방향으로 가다가 창천리에서 12번 국도를 타고 대정 방향으로 간다. 감산리 삼거리에서 대평리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용왕난드르마을이다.(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공항에서 중문관광단지행 600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중문관광단지에서 내린 뒤, 시내버스를 타고 중문 시내로 간다. 제주은행에서 내려 맞은편에서 1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용왕난드르마을이다.)
13:00 | 용왕난드르 향토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강된장비빔밥 6천원, 보말수제비 5천원, 용왕구징기(돌솥밥) 1만원 등. 용왕 회정식은 미리 예약한다. 1인당 15000원(2명 이상).
14:00 | 대평포구에서 산방산 들머리까지 제주올레 9·10 코스를 따라 걷는다. 가벼운 옷차림과 운동화면 충분하다. 바위에 스프레이로 칠해진 파란 화살표를 따른다. 제주올레 누리집(jejuolle.org)에서 간략한 지도를 볼 수 있다. (064)739-0815.
17:00 | 산방산 입구에 도착. 해넘이를 기다린다. 주변의 산방굴사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택시를 불러 용왕난드르마을로 돌아간다. 1만2천~1만5천원 정도. 모슬포콜택시 (064)794-5200.
18:00 | 용왕난드르마을에 민박이 많다. 1박 4만원 가량. 자세한 정보는 누리집(sora.go2vil.org) 참고. 중문관광단지의 호텔에 묵어도 좋다.
⊙ 둘쨋날
09:00 | 마을 주변을 산책한다. 바닷가와 선비기돌 산책길을 걷거나 시간을 들여 군산오름에 오를 수 있다. 군산오름에서는 한라산과 제주 서부의 전망이 펼쳐진다.
10:00 | 주민들이 진행하는 마을 체험 활동을 이용해 보길. 보말(소라) 잡기, 염색 체험, 젓갈·마늘고추장·비누·양초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이 있다. 체험비는 1인당 2천~1만원. 일정을 미리 문의할 것. (064)738-0915.
12:00 | 점심을 먹고 근처의 명소를 찾아간다. 10분 거리인 중문관광단지로 찾아가 여미지식물원, 테디베어박물관, 해안산책로 등을 둘러봐도 좋고, 태평양에서 운영하는 설록차박물관 ‘오설록’(osulloc.co.kr)을 구경하고 녹차밭을 거닐어도 좋다.
15:00 | 제주공항 가는 길에 새별오름을 들른다. 95번 고속화도로 봉성교차로 지나 왼쪽으로 보인다. 이달 15일까지 산불 예방을 위해 입산이 제한된다.
17:00 | 제주공항에서 서울로 출발한다.
제주=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제주 여행지도
설록차박물관 ‘오설록’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
하이라이트는 여기서 시작된다. 제주올레 제9구간인 이 길은 해안 절벽을 따라 화순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왼쪽에는 푸른 태평양이 펼쳐진다. 오른쪽은 심연처럼 깊은 숲이다. 길은 평탄한 흙길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데면데면하게 뺨에 부딪친다. 흙길은 남제주화력발전소로 꽂히듯 내려가 아스팔트길로 바뀐다. 여기서 화순 선사유적지를 둘러보고 화순선주협회를 지나면 화순해수욕장이다. 화순해수욕장 해변은 색채의 낙원이다. 특히 초겨울 해가 질 즈음의 흑사장과 남색 바다 그리고 누런 햇빛은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해수욕장을 떼지어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마치 지구에 불시착한 이들 같다. 외계인들과 함께 갯바위 지대를 통과하고 다시 모래밭을 지나 산방산 어귀에 다다랐다. 용왕난드르마을에서 여기까지 넉넉잡아 세 시간 걸린다. 이튿날은 용왕난드르마을에서 지냈다. 이즈음 마을에선 계절감각이 둔해진다. 이 지역 특산물인 마늘 밭이 푸르고, 마을을 뒷산 군산오름도 푸르고, 박수기정 절벽에 매달린 소나무도 푸르다. 제주도 남쪽이라 매서운 겨울바람도 한풀 꺾였다. 오전은 마을 올레(골목)길을 산책했다. 총총히 올린 제주 돌담, 돌담 위로 뻗은 들국화, 들국화 뒤로 팔랑거리는 억새.
용왕난드르 마을엔 가족들이 즐길 만한 프로그램이 많다. 대평포구 앞에서 열린 소라 줍기 체험.
밀감농장에서 직접 밀감을 땄다.
화순해수욕장에서 산방산으로 가는 해안길.
화순해수욕장의 모래밭은 어두운 빛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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