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면역작용. 크룹스 제공
[매거진 esc] KRUPS와 함께하는 커피 사연 공모전
스물두 살 여름, 그 아이와 헤어졌다. 이별의 첫맛은 의외로 밍밍했다. 흔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에이, 별거 아니잖아. 까짓것 괜찮아. 모두 겪는 거잖아. 이것도 공부지 뭐. 잘 배웠습니다. 이건 정말인데 저 진짜 괜찮거든요?
쿨하게 먼저 뒤돌아 이어폰을 꽂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가슴 아랫부분이 불에 지핀 것처럼 뜨거워졌다. 다 타서 구멍이 뚫려버릴 것 같이 화끈거렸다. 게다가 땡볕의 아스팔트 위로 이글거리는 아지랑이는 왜 그렇게 어지럽던지. 치밀어 오르는 현기증에 딱 쓰러질 것만 같던 와중에도 “괜찮다”라고 되뇌고 있었다. 이 등신, 괜찮긴 뭐가 괜찮아. 괜찮을 턱이 없잖아.
그러고는 탈탈거리는 샌들 뒷굽을 보도블록에 부딪히며 앞에 보이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이 잘 오는 쪽 테이블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땀에 젖은 앞머리를 날리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주문대로 가서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그날따라 왜 한 번도 마셔본 적 없는 시커먼 에스프레소를 시켰을까.
그 아이와 붙어 다닐 때 커피도 참 어지간히 마셨더랬다. 학교 앞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팔짱을 끼고 들어가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새로 온 손님들이 앉을 자리가 있든 없든 몇 시간이고 테이블에 죽치고 앉아 수다나 떠는 게 그 시절 갈 곳 없는 캠퍼스 커플 데이트 코스의 트렌드였다. 자연스레 유명 커피숍의 메뉴는 거의 다 맛보게 되었으나 커피가 목적이 아니었던 데이트에서 에스프레소만은 왠지 건드릴 수 없었다.
에스프레소에만은 그놈과의 기억이 녹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걸까? 시커먼 액체에 입술만 갖다 대었다. 커피를 맛보며 “망할 놈의 커피네”라고 인상을 찌푸려도 테이블 맞은편에 내 짜증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 순간이 굉장히 낯설었고 차가웠고, 아렸다. ‘바닥도 깊이도 알 수 없는 어둠과 쓴맛으로 무장하였으면서 고소한 향기로 유혹하는 이 액체보다도 더한 건, 남자야!’란 생각과 동시에, 에스프레소를 원샷 하였다. 에스프레소는 예상보다 훨씬 진했고 눈물이 왈칵 볼 위로 쏟아졌다.
그날 밤 남자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커피가 너무 써서 우는 거라며, 달이 저물 때까지 엄마 품에 기대어 눈물, 콧물 할 것 없이 한 바가지쯤 쏟아냈다.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뀐 이제, 에스프레소를 마셔도 눈물이 나오진 않는다. 커피도 마시면 면역력이 생기는구나. 커피에도 면역작용이 있다는 사실, 사랑이 내 삶을 관통하며 가르쳐준 비밀이다.
이연혜/서울 광진구 화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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