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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킬힐, 스틸레토 힐 등 올림픽 표어처럼 ‘더 높게, 더 날카롭게’ 달려가는 구두들의 유행에서 ‘하이힐’이라는 말은 이 뾰족구두가 잘 어울렸던 마릴린 먼로의 영화만큼이나 고전적으로 들립니다. 어쨌든 ‘하이힐’ 하면 영화가 떠오르는데, 의심쩍은 여성으로 등장하는 제니퍼 제이슨 리가 남자의 안구에 그 뾰족한 굽을 사정없이 내리쳐 살인하는 <위험한 독신녀>의 한 장면입니다.
물론 하이힐을 살인 무기로 쓸 여성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면 꽤나 상징적입니다.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고-달리거나 오래 걸을 수가 없죠- 때로 발에 고통까지 주는 하이힐이지만 쫙 빠진 높은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걷는 여성에게는 섹시함 이전에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여기엔 높은 신발 덕에 말 그대로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신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남보다 큰 키 때문에 20대부터 하이힐은 ‘남자들을 물리치는 불운의 아이템’이라 믿어오면서도 저 역시 하이힐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음 신어본 8㎝짜리 하이힐은 발가락이 뭉그러지는 듯한 아픔을 줬지만 과연, 그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뿌듯함을 선사했습니다. 웬만한 성인 남자의 정수리를 눈 아래 두고 ‘깔아보는’ 기분이 썩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하이힐을 현대의 ‘전족’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 마성의 신발에는 분명 눈에 보이는 고통을 상쇄하는 쾌감이 있습니다.
올여름 대세라고 하는 킬힐이 유행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여성의 구두 굽이 높아진다죠. 실업에, 물가에 위축되는 마음의 반대급부와 열망이 구두 굽에 반영되는 것이겠지요. 그럼 남자는 힘 안 드냐고 항의하실 독자들을 위해 표지 기사에 준비했습니다. 방송인 노홍철씨가 10㎝ 키높이 구두를 맞췄다는 수제화 가게도 소개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남성들도 키높이 구두로 하이힐의 ‘은밀한’ 매력을 즐기는 대신 뾰족구두로 남녀평등 실천하는 건 어떨까요?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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