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제 그거 봤어?
[매거진 esc] 너 어제 그거 봤어
돈이 너무 많아서 고민인 공주? 돈이 너무 없어서 고생인 머슴? 전래동화에 나올 것 같은 이 캐릭터가 아직도 회자된다면 그건 ‘돈’ 또는 ‘사랑’의 아이러니 때문일 것이다. 윤은혜의 컴백으로 화제가 된 <아가씨를 부탁해> (한국방송)가 아직은 예상을 뒤집어엎는 신선한 구도에 들어서지 못한 가운데, <10 아시아>(www.10asia.co.kr)의 백은하 편집장(사진 왼쪽)과 최지은 기자가 <아가씨를 부탁해>를 들여다봤다. 설정으로 주장만 할뿐, 캐릭터 밀도 떨어지는 ‘아가씨를 부탁해’
윤은혜 발음 탓하기 전에 허술한 대본, 엉성한 연출부터 점검하길 최지은(이하 최) <아가씨를 부탁해>는 한국방송의 상당한 기대작이었다.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에이급 스타 반열에 오른 윤은혜의 컴백작이었다. 윤은혜가 갖고 있는 인지도나 스타성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지만 막상 이 작품의 정보는 부족했던 것 같다. 제목이 <레이디 캐슬>이었다가 바뀌었는데 기획 기간에 비해서 구체적인 준비 일정이 짧았다. 주인공 강혜나(윤은혜 분)라는 인물은 한국의 패리스 힐튼,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같은 성격을 가진 캐릭터다. 이런 캐릭터가 임팩트를 주려면 무엇보다 비주얼적인 효과가 중요한데 그 효과가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저택이나 미남 집사, 고급 차 등의 설정은 있었는데 그걸 보여주는 방식이 새롭지 않았다.
〈아가씨를 부탁해〉 한국방송 제공
백은하(이하 백) 부자들의 디테일이 빠진 느낌이었다. 강혜나가 아무리 유명 디자이너의 고급 옷을 입고 있어도 절대 럭셔리해 보이지 않았다. 극중 집사인 서동찬(윤상현)과 아가씨 강혜나의 관계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봐야 하는 게 빈부 격차와 계급 격차인데 이런 점이 잘 드러나지 않은 거다. 인권 변호사인 이태윤(정일우), 서동찬, 강혜나, 여의주(문채원)는 성 역할이나 계급 역할이 상하층 계급의 남녀로 딱딱 찢어진 듯 꼭짓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각각의 차이가 안 느껴졌다. 이것 때문에 드라마의 재미나 긴장감이 덜한 것 같다. 최 근래 한국 드라마에선 재벌이 특히 많이 나온다. <꽃남>에서 <아가씨를 부탁해>로 이어지는 재벌과 서민의 사랑이 약간의 판타지를 두고 계속 등장했다. 그런데 이걸 만드는 제작진이 현실의 빈부 격차에 대해 최소한의 고민을 하고 있나 의심스럽다. 이 인물은 원래 부자니까 부자고, 저 인물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니까 그렇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내면적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백 유일하게 내면적 고민이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강혜나가 이태윤에게 충격을 받고 나서 술 먹고 엉엉 울며 “내가 부자인 게 죄야!! 돈 많은 게 죄야?”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죄는 아니고, 사실 너무 부럽지(웃음). 그런데 이 장면으로, 강혜나가 겪고 있는 갈등을 ‘이렇게 보여줬으니까 됐지?’ 하고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인물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으니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 하는 방식이랄까. 최 드라마에는 집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집사라는 설정에 대해서 비판했던 많은 사람들이 ‘왜색이다,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게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빈부 격차를 표현하기 위한 설정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문제는 아가씨가 “넌 나의 집사니까”라고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 것 외에는 집사와 아가씨의 관계가 밀도 있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백 계급과 빈부 차이를 그렸던 드라마 중에선 <발리에서 생긴 일>이 새로운 지점을 남겼던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빈부 격차가 남녀 관계의 헤게모니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었다. 사랑이라는 특별한 관계에서는 빈부의 헤게모니를 뛰어넘는, 누가 서로를 더 강렬하게 바라는가에 대한 관계의 헤게모니가 있지 않나. <발리에서 생긴 일>은 그 관계의 헤게모니가 역으로 상충할 때 얼마나 재밌어지는가를 보여줬다. 만약 서동찬이 가난하지만 아가씨의 마음을 얻는다는 식의 역전이 있다면 훨씬 입체감이 있을 것 같다. 지금은 각자의 계급에 맞게 없는 자는 계속 가난하고, 있는 자는 계속 있는 식으로 순탄하게 흘러간다. 최 빈약한 이야기 안에서도 윤상현의 열연은 돋보인다. 노련한 연기가 이 드라마의 가장 좋은 대목인 것 같다. 서동찬이라는 인물은 전직 제비였고 5천만원 빚을 진 뒤, 부잣집 아가씨인 혜나를 꼬셔 보려고 마음먹고 있다. 한데 기본적으로 착한 성품을 갖고 있는 이 인물이 남의 돈을 ‘등쳐먹으려’ 한다는 설정이 잘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또 캐릭터와 사건을 분리해서 보면 서동찬이란 인물은 입체감도 있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교회에서 간증하는 신이나 윤은혜를 바라보는 장면도 좋았다. 이 작품이 잘 안되더라도 윤상현의 커리어에는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지 않다. 백 윤상현의 연기 자체는 <내조의 여왕>에서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금 드라마에선 유난히 자기 페이스를 지키면서 고군분투하는 듯 보인다. 첫 방송 후 윤은혜의 발음 논란이 인터넷상을 달궜다. 단순히 어린 연기자가 연기를 못하고 있다거나 누구 약발 떨어졌다는 식의 문제가 핵심은 아니다. 전적으로 드라마의 기본을 짜는 작가 혹은 연출의 문제다. 드라마는 실패해도 윤상현은 남을 것
대한민국 최고 상류층 여성과 전직 제비 출신 집사의 사랑을 그리는 <아가씨를 부탁해>.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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