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놀타 X-700
[매거진 esc] 카메라 히스토리아
사진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라면 언제나 카메라 업그레이드의 유혹에 빠지게 마련이다. 장비가 좋은 사진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도 이 유혹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업그레이드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는 결국 ‘지름신’이 내리는 순간 폭발한다. 내가 구하는 카메라나 렌즈를 샀을 때의 뿌듯함을 무엇에 비하리오.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아내가 알아챌까 두려워도 당장은 행복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력한 지름신의 후유증으로 자금 압박을 견디지 못해 카메라를 장터에 내놓을 때가 있다. 다행인 것은 카메라는 예나 지금이나 환금성이 있다는 것. 미놀타 X700,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던 첫 번째 카메라이자 가게에 팔았던 첫 번째 카메라다. 아버지 몰래 표준렌즈와 70-210㎜ 망원줌렌즈까지 포함된 X700을 팔아 받았던 돈은 고작 25만원. 그 돈을 받아 쥐고 가게 문을 열고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방에서 X700을 꺼내 놓자 사장님이 했던 말은 간단했다. “이거 너무 흔해서 값을 못 쳐주는데 웬만하면 가지고 있지.” 사장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진열장 한쪽에 여러 대의 X700이 쌓여 있었다. 10년이 넘은 이야기다. X700은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에스엘아르 카메라다. 1978년 11월 삼성은 계열사 삼성정밀에 광학부를 신설하고 2개월 후인 79년 1월부터 미놀타에서 렌즈와 부속품을 공급받고 조립 라인을 가동했다. 한국 시장에 관심을 가졌던 미놀타는 삼성정밀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XD5, X300 등 카메라를 선보였다. 그리고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X700 판매에 주력한다. 텔레비전 광고까지 하며 ‘신제품’ 홍보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X700은 이미 81년 개발되어 해외시장에 나왔던 구모델. 생산된 지 7년이나 지난 X700을 삼성이 가져와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X700의 가장 큰 장점은 초점만 신경 쓰면 노출은 알아서 맞춰주는 P(프로그램) 모드가 있다는 것. 프로그램 노출 모드는 X700이 세계 최초였다. 지금은 P 모드 없는 카메라가 없지만 당시로선 미놀타만의 앞선 기술이었다. 에스엘아르 카메라의 M 모드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P 모드를 사용하면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캐논 AE-1, 펜탁스 MX, 니콘 FM2 등 다른 브랜드의 경쟁 기종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고 기능 면에서 전혀 뒤지지 않았다. 덕분에 사진을 처음 배우는 아마추어, 가족을 촬영하기 위해 저렴하고 부담 없는 카메라를 구입하고 싶었던 아빠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X700도 단점은 있었다. 가격을 낮추기 위해 플라스틱 몸체에 직물로 만들어진 수평 이동식 셔터를 넣는 바람에 내구성이 떨어졌다. 특히 셔터 늘어짐은 고질적인 문제였다. 사진의 일부가 까맣게 나오는 현상은 오래된 X700에서 자주 일어났다. 처음에는 약간만 까맣게 나오다가 쓸수록 검은 부분이 늘어났다. 그 때문에 훨씬 전에 나왔던 XD5 기종보다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단점을 삼성의 애프터서비스로 보완했다. 고장이 나더라도 집 가까이 있는 에이에스(AS) 센터에 맡길 수 있다는 점은 상당한 매력이었다. 값비싼 귀중품이 아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가전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우리나라에서 에스엘아르의 대중화를 이끈 카메라가 바로 X700이다. 글 조경국 월간<포토넷> 기자·사진제공 아트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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