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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늘 거기 있다

등록 2009-12-09 18:46

비상문
비상문
[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극




요가 강습을 받던 어느 날 아침, 송장자세로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출입문 위에 붙은 ‘비상문’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비상문을 보면서 비상시 어디로 가면 일사불란하게 탈출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한다고 써보고 싶지만, 이제껏 수많은 비상문(EXIT)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오색 삼각형 아래 네모난 상자로 단출하게 그려진 대피소 디자인이나 ‘위험’ ‘낙석주의’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실제 비상시 비상구를 바라보면 얼마나 온몸이 떨리고 무서울까 생각하면 오싹하지만 말이다.

흔히 비상구로 알려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상문이라고 쓰여 있다. 비상문 디자인, 정확히 말해 비상문을 나타내는 픽토그램은 간결하다. 시설·행위·개념 등을 상징화된 그림문자로 나타내는 픽토그램은 불특정 다수가 한 큐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징’ 용법을 구사한다. 비상문 픽토그램도 녹색 배경에 흰 사각 문을 들여놓고 한 사람이 뛰쳐나가는 찰나를 포착했다. 남자인가 여자인가? 중성이라고 해주자. 그래야 모두의 공감대를 살 수 있으니까. 물론 옷도 입히지 않았다.

움직이는 사람의 얼굴은 동그랗다. 몸은 옆모습으로 다급하게 뛰어가는 장면이지만 얼굴은 옆얼굴을 묘사한 타원형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동그란 형태로 그렸다. 몸은 두 팔 벌려 뛰어가는 옆모습이다. 유치원 아이들은 몸통 앞면을 자주 그리지만 사실 뛰어가는 자의 앞면을 그리는 건 쉽지 않다. 비상문 픽토그램은 과학적으로 인체 비율을 따져 보면 있을 수 없는 동작이다. 호기심을 푸는 한 공영방송 프로그램에서 이 자세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은 애크러배틱한 자세라는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자세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요소는 45도로 살짝 굴절된 선으로 표현된 바닥(그림자)이다. 이 바닥면은 인물의 배경에 공간감을 불어넣는다. 뛰어가는 동작에 속도감이 붙고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듯도 보인다. 다급한 상황이라는 걸 사선을 통해 긴장감 있게 덧입혔기 때문이다.

늪지로 사냥을 나간 네바문
늪지로 사냥을 나간 네바문

이렇게 얼굴은 정면에서 본 듯, 몸은 측면에서 본 듯 그리는 건 픽토그램의 어법만이 아니다. 아주 오랜 과거로 들어가 보면 이집트 시대의 재주꾼들도 투탕카멘 왕을 이런 식으로 그렸다. 기원전 1400년에 그려진 ‘늪지로 사냥을 나간 네바문’을 보자. 한 손에 기세등등하게 튼실한 새를 잡고 한 손에는 자기가 직접 잡았다는 걸 증명하는 화살을 들고 있다. 얼굴이 옆면이라고? 자세히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이렇게 동그란 눈동자가 완벽하게 중심에 서 있는 건 정면에서 봤을 때다. 이집트 화가들은 인물을 ‘아는 대로’ 그렸다. 이집트 무덤의 벽화는 ‘보는 대로’ 인물을 기록하기보다 우리가 그를 ‘알았던 대로’ ‘느꼈던 대로’ 남겨둬 오래오래 망자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임무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리기의 방식이 가능한 이유를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환영’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우리의 ‘환영’에 필요한 건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기대감이다. 비상문 픽토그램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대감은 비상문에 그려진 인물이 지금 막 급해서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환영을 보도록 작용한다. 비상구만 해도 우리는 이 남자가 지금 비상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안다. 뛰는 동작은 절도 있고 침착하다.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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