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나보다 잘난 그녀, 놓아줄까요

등록 2009-12-30 18:43수정 2010-01-03 11:08

나보다 잘난 그녀, 놓아줄까요.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나보다 잘난 그녀, 놓아줄까요.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한동원의 오케이 상담실
데이터 야구는 김성근 감독 일, 감독 눈치 보다 알아서 마운드 내려오는 투수 될래?
Q 전 스물여섯살, 키 180, 평균보다 좀 낮은 외모에 좀 마른 몸매입니다. 지금까지 변변찮은 연애 한번 못 해 보다 올해 저보다 두살 많은 여성과 연애중입니다. 문제는 원래 남 신경을 그리 쓰지 않던 제가 연애를 하면서 점점 걱정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제 직장은 누가 봐도 괜찮은 직장인 것도 아니고, 월급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녀 나이 스물여덟, 결혼이라든지 미래에 대한 생각이 가득할 텐데 저 같은 놈을 만나도 될는지요. 아직 변변하게 모은 재산도 없고, 그렇다고 집이 유복하여 도움을 바랄 처지도 안 됩니다. 대학도 제가 벌어 다녔고. 성인이 되고 나선 집에 크게 의지해본 적도 없습니다. 아무튼 제 욕심 때문에 그녀를 붙잡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맴도네요. 그녀 정도면 솔직히 저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를 충분히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추신. 그녀는 결혼한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하는 것 같아요. 경제력이나 조건 등을 얘기할 때도 많네요. 그리고 남들보다 못사는 건 안 좋아하더라구요.

A 필자가 평소 개봉영화 적정관람료 산정에 다망하다 보니 고민상담 업계에 몸담은 경험 매우 일천하다만, 뭐, 결국 ‘어떤 영화를 볼 것인가’나 ‘어떻게 연애할 것인가’나 따지고 보면 별반 차이가 없는 일이므로, 답변드리면 다음과 같다.

① 그걸 왜 니가 걱정하세요. ② 그만하면 너도 충분히 잘났어요. ③ 데이터 야구는 김성근 감독님께 맡기세요. 항목별로 세부 정리해 보자. 일단 ①번. 의뢰인의 진술로 미루어보건대, 의뢰인의 여자친구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의뢰인이 오지랖 넓게도 대신 해주고 있는 걱정을 약 14배가량 세분화된 시나리오에 따라 약 357배가량의 빈도수로 시뮬레이션하고 있으리라 사료된다. 뭐,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의뢰인보다는 많이 한다. 왜냐. 본인 일이거든. 본인 걱정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제일 확실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뮬레이션 결과, 다시 말해, ‘의뢰인 같은 놈’하고 만나도 될지 안 될지를 겁나 생각한 결과, 그녀는 의뢰인을 만나고 있는 거다. 그게 아니었다면 의뢰인은 지금 이런 사연을 보내고 있었겠지. ‘여친하고 헤어졌는데 너무 괴로워요’ 등등.

다음 ②번. 의뢰인은 대학도 본인이 번 돈으로 나왔고, 성인 된 다음에는 집에 크게 의지한 적도 없다고 했는데, 이게 고민인지 자랑인지 필자 다소 헷갈린다만, 아무튼 이것이 사실이라면 결론은 이렇다. 너도 그만하면 꽤 잘난 놈이군요. 아시다시피 요즘 대학 등록금은 사회문제다. 대충 사회문제가 아니라 본격 사회문제다. 웬만한 알바나 적금 정도로는 쉽게 커버가 되지 않는 액수고, 그래서 뉴스에서도 ‘방학기간에도 알바전선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어쩌구 하면서 보도를 해대는 거 아니겠나. 둑 쌓고 강바닥 파고 할 돈으로 이런 거 커버해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런 거 안 해주는 이런 카인드오브 나라에서 자기 힘으로 대학을 나왔다는 건 대단한 거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런 올림픽 중계방송스런 어휘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만, 장하다, 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근데 혹시 농협이라도 터셨는가? 아니, 정말로 궁금해서.

그리하여 ③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변하게 모은 재산’이 없는 관계로 26년 만에 처음 사귄 애인하고 자진해서 헤어지겠다면, 뭐, 말리지는 않겠다. ‘사랑하기에 그대 떠나리’ 한판 멋지게 해 보고 싶다면, 그래야지 어쩌겠어. 하지만 이를 결행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스물여섯살에 ‘변변하게 모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비(정지훈)군 등등을 빼고 과연 몇 명이나 있는지를. 아, 물론 부모님 재산 센터링 받은 경우는 제외고.

기왕 시작한 김에, 이것까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지금 의뢰인이 하고 있는 고민을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당장에 해결할 수 있는가? 그리고 현재 의뢰인의 상황을 여자친구는 전혀 모르고 있는가? 둘 다 아니잖아. 그런데도 여자친구는 의뢰인 계속 만나고 있고. 그럼 여기에서 의뢰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만일 그녀가 의뢰인의 데이터를 완전 분석해서 선수교체 시기를 결정하는 에스케이 김성근 감독님 야구 스타일 같은 타입이라면 특히나 그렇다. 투수 본인은 앞으로 공 300개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감독님께서 데이터에 기초해서 바꾸시겠다면, 어쩌겠어. 내려와야지.

하지만 감독님께서 가만히 계시는데도 ‘그래, 우리 감독님은 데이터에 철저하시니까, 지금쯤 나를 마운드에서 내릴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 나를 바라보시는 저 미묘한 눈길은 바로 그 신호야. 그러느니 차라리 내가 자진해서 내려가자.’ 뭐, 이런 생각을 해갖고는, 투수가 갑자기 공 던지다 말고 제 발로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오면, 그거 얼마나 골때리겠어. 그리고 바로 이게 의뢰인이 구상하고 있는 야구다. 강판당할까봐 두려운 나머지 내가 먼저 내려와 버리는 야구.


한동원의 오케이 상담실
한동원의 오케이 상담실
뭐, 연애가 한국시리즈 7차전은 아니니까, 그런 걸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하지만 필자가 걱정하는 건 그 뒤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그리고 거의 94% 이상의 확률로 훨씬 강화돼 있을 자진납세 정신. 그건 의뢰인의 선수생명에 전혀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생각해 보시라. 너 같으면 그런 투수를 쓰고 싶겠는가? 데이터 야구고 믿음의 야구고 뭐고를 떠나서?

다행히도 연애는 야구가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도 없고, 실패도 없다. 연애란 건 시작 그 자체로 성공인 거다. 게다가 연애는, 어쨌거나 좋은 거다. 그러니 부디 데이터 야구는 김성근 감독님께 맡기고, 의뢰인은 지금의 연애나 충분히 즐기시라.

오케이?

한동원 영화평론가

※ 바뀐 듯 안 바뀐 듯 뭔가 어색한 거 벌써 눈치채셨습니까? 관계면과 엔터테인먼트면을 채우던 필자와 대담자들이 송년특집호에서 슬쩍 자리를 바꿨습니다. 여기서 퀴즈. 본래의 칼럼과 맞는 필자의 짝을 찾아주세요. 맞히신 분들께 esc가 새해 복 갑절로 기원해드립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