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한 〈충돌과 반동〉 전시작들.
[매거진 esc] 한국의 사진가들
우리 땅, 무속을 낯선 앵글 안에 담아온 사진가 이갑철, 다음 피사체는 도시 속 영혼들
우리 땅, 무속을 낯선 앵글 안에 담아온 사진가 이갑철, 다음 피사체는 도시 속 영혼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깜깜한 지방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잔잔한 동요가 울려 퍼진다. 산도둑처럼 덥수룩한 수염으로 얼굴을 메운 한 사내가 조용히 운전대를 잡고 말없이 달린다. 그 사내가 도착한 곳은 우리 땅 외진 산골. 노루 같은 짐승 외에는 생물체라고는 도통 발견할 수 없는 적막한 풍광 사이로 셔터 소리가 우박 소리처럼 울린다. 사내는 사진가 이갑철(51)이다. 쉰이 넘은 이 남자는 카메라를 메고 떠난 길에서 늘 동요를 듣는다. 어색하고 덜 익은 감처럼 떫다.
동요는 그가 사진을 찍기 전에 하는 준비운동이다. “사진은 느낌이 넘쳐야 찍을 수 있다. 대상을 보는 순간 가슴에서 감정이 120~130% 흘러넘쳐야 한다.” 그는 출발지에서부터 그 감정을 만들기 위해 동요를 듣는다. 불경도 듣는다. 참선하는 수도자의 마음이 된다. 비우고 동심으로 채운다.
동요 들으면서 촬영 전 마음 비우기
도착한 굿판에서 그는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신들린 감정을 좇아 셔터를 누른다. 여러 번 만난 무속인과도 그저 눈인사만 찡긋할 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내가 다녀온 곳 지명도 잘 모른다. 그 굿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 어떤 (역사적) 의미인지도 몰라.” 그는 많이 알수록 느낌은 묻힌다고 말한다. 여느 다큐멘터리 사진가들과 다르다. 사진교본에는 ‘많이 알수록 많이 관찰할수록 훌륭한 사진이 만들어진다’로 적혀 있다. 그런 이유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셔터를 누르기 전에 수만 권의 책을 읽는다. 피사체를 만나 엄청난 에너지로 소통하고 난 후에 카메라를 잡는다. 그는 다르다. “알고 싶지도 않고, 친해지기도 싫다”고 말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재지만 그의 사진이 낯설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가까이 다가가’서 피사체의 모든 아우라에 휩쓸려 버리는 일을 그는 거부한다. 사진 안에 분명 그가 아닌 피사체가 있지만 들여다볼수록 ‘이갑철’이 보인다.
이렇게 오로지 자신 안에 ‘기’, ‘느낌’만을 따라 찍었던 사진은 드디어 2002년 금호미술관에서 연 전시 ‘충돌과 반동’에서 폭발한다. 초점은 흔들렸고 선들은 쓰러질 듯 기울어졌다. 피사체는 프레임의 귀퉁이에 몰려 갔다. 장례식을 바라보는 쪽 찐 여인네의 시선은 죽은 이를 보내는 슬픔보다 기괴한 기운이 느껴져 섬뜩하기까지 하다. 구도는 파괴적인데 그 사진이 뿜어내는 것은 폭력적인 고통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를 뜯는 애잔함이다.
사진평론가 최봉림은 “전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적인 소재를 고요함이나 토속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공격성, 으스스함 등으로 해석했다. 거칠고 예기치 못한 카메라워크(촬영기법)가 대단히 훌륭했다”고 말한다.
이 전시 이후 이갑철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접받는 인기작가’가 되었다. 크고 작은 전시에 단골 초청작가가 되었고, ‘2003년 동강사진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이 이어졌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고, 국외 사진계의 관심도 커졌다. 프랑스 유명 에이전시 ‘뷔’(Vu) 소속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부터 ‘거친 미학’에 미친 작가는 아니었다. ‘충돌과 반동’ 이전에 그가 한 전시들, ‘거리의 양키들’이나 ‘이미지 오브 더 시티’(Image of the City), ‘타인의 땅’들은 그만의 독창적인 시선이 약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좋아한다고 말하는 미국의 세계적인 사진가들인 로버트 프랭크나 리 프리들랜더, 게리 위노그랜드의 흔적이 보인다. “‘거리의 양키들’은 25살에 찍었는데 로버트 프랭크식의 사진을 우리 땅에서 한번 해보자, 그래서 이태원을 찾았지.” 그는 그 시절을 습작 시절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자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일찍부터 이미 그 시간들은 준비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진주가 고향인 그는 6남매의 넷째다. “집안에서 자유로웠지, 공부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 찾아다녔지”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연탄, 쌀, 학용품까지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을 운영했다. 그 시절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그는 사진 재료를 사기 위해 “아버지의 수북한 돈통”을 장난스럽게 터는 악동이었다. 재수를 하고 들어간 고등학교에서도 그는 ‘유별난 학생’이었다. 머리는 빡빡 깎고 군화를 신고 다녔다. 휴일이면 사진기 하나 달랑 메고 정처 없이 다니던 “꼴통”이었다. “인기가 좋았지. 학교 불량서클에서 서로 영입하려고 난리였지.”
사진콘테스트에서 곧잘 상을 탔다. 사진과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대학에서 “연애도 시간이 아까워서 안 했다. 오직 사진만 찍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사진기자나 뭐 사진으로 밥벌이할 생각은 전혀 안 했고 오직 사진가로 일어서는 것만”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저 평탄하게 이어질 것 같은 그의 삶은 27살 꺾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고 그는 서울에서 2년간 노숙을 했다. “서울역에서도 많이 잤지, 집도 절도 없던 시절”이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진작업’이 벽에 부딪혔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라이카카메라도 망치로 부숴버릴 정도였다.
1988년 ‘타인의 땅’을 경인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지금의 부인과 그 전시장에서 결혼을 하고, 계몽사(출판사) 등에서 사진기를 잡으면서 그는 서서히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출판사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 자연과 무속, 전통의 “가슴 시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미치도록 열심히 찍었다. 그 결과물이 14년 뒤에 나온 ‘충돌과 반동’이었다.
한때 노숙자 생활하며 카메라 부숴
우리 옛것에 폭 빠졌던 그가 지금은 현대적인 도시를 찍고 있다. “스님이 도를 닦다가 절에서는 득도할 수 없어 차라리 세속에서 찾아보자”고 내려온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말한다. “도시 구조물 속에서 떠다니는 영혼들이 마치 도시 불빛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느낌’을 이제 도시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많은 사람들이 불교 신자라고 알고 있는 그는 정작 기독교 신자다. “불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좋은 선생이다. 달란트를 주고 인도해주시는 그분(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산다고 말한다.
여섯 번째 개인전이 될 ‘도시사진’은 어떤 거친 숨일지 기대된다.
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작품사진 이갑철 제공
2002년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한 〈충돌과 반동〉 전시작들.
2002년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한 〈충돌과 반동〉 전시작들.
이 전시 이후 이갑철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대접받는 인기작가’가 되었다. 크고 작은 전시에 단골 초청작가가 되었고, ‘2003년 동강사진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이 이어졌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었고, 국외 사진계의 관심도 커졌다. 프랑스 유명 에이전시 ‘뷔’(Vu) 소속작가가 되었다.
2002년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한 〈충돌과 반동〉 전시작들.
〈타인의 땅〉 전시 작품, 신촌, 1987년.
이갑철 사진가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