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와 민의 ‘리스트 마니아’
[매거진 esc] 슬기와 민의 ‘리스트 마니아’
1목록(list)은 짤막한 정보를 일정한 순서로 적은 기록이다. 이 글도 일종의 목록이다. 2 목록은 아름답다. 목록은 뚜렷한 리듬을 보여준다. 간결한 문장은 시적이다. 목록은 현실보다 더 질서 있는 세계를 표상한다. 3 디자이너 사이에서 ‘군대식 정렬’이라고 하는 목록 배열법이 있다. 항목들 길이가 다를 때, 짧은 항목 글자 간격을 벌려 긴 항목에 양끝을 맞추는 방법이다. 음식점 차림표에서 흔히 보이는데, 줄 간격이 좁으면 가로로 흘러야 할 시선이 세로선을 따르면서 ‘짜짱우탕깐’처럼 신기한 언어를 창조한다. 4 목록은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다. 보기 좋고 읽기 좋은 목록을 만들 줄 아는 그 디자이너라면 먹고사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어디 먹고살기가 쉬운가. 1970년대에 전설적인 네덜란드 디자인 회사 토탈 디자인은 전화번호부를 디자인했다. 이름과 주소 뒤에 붙던 전화번호를 맨 앞에 단 것이 주요 혁신 가운데 하나였다. 서양 인명이나 주소는 길이가 제각각이지만 전화번호는 길이가 일정하므로, 전화번호를 앞에 달아 훨씬 질서 정연한 목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시민이 ‘번호로 불리는 데’ 거부감을 표했고, 다음 판에서 전화번호는 항목 끝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5 목록은 종종 사회나 시대를 압축해 표현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목록은 역시 주식시세표가 아닐까. 언젠가 친구 한 명은 일간지 주식시세표를 가리키며, 다른 지면은 모두 시세표 이해를 돕기 위한 콘텍스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6 목록은 외국어 공부에 필수적이다. 사전도 목록이고 단어장도 목록이다. 독일 미술가 카린 잔더는 <뉴욕 타임스> 지면을 빌려 ‘단어 검색’이라는 프로젝트를 했다. 작가가 고른 단어들을 뉴욕에 거주하는 여러 언어권 주민들 말로 옮겨 적은 것이다. 신문에 실린 그 ‘20세기 차용어 목록’은 신기하게도, 어쩌면 당연히, 주식시세표를 닮았다. 7 목록은 청각적이기도 하다. “컴퓨터-모니터-프린터-팩스-전화기-티브이-오디오”를 반복하는 고물수집 트럭 방송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읽는 목록은 주술적 느낌마저 준다. 초등학교에 등교한 첫날,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출석 부르기였다. 경건한 하루 수업을 시작하기 전 일정한 세 음절 호명과 단음절 대답을 반복하며 의례처럼 치르는 출석 부르기를 통해, 교실은 신전이, 담임 선생님은 사제가, 우리는 신도가 됐다. 8 목록은 순서를 규정할 수밖에 없고, 순서는 위계를 암시한다. 목록에서 첫 항목이나 마지막 항목은 왠지 그 사이 것들보다 중요해 보인다. 위계에 민감한 한국에서 사람 이름을 목록화할 때, 그 순서는 종종 민감한 문제가 된다. 초대 인사 소개 목록은 테이블 자리 배치와 마찬가지로 관습, 눈치, 배려가 뒤섞이는 예술이다. 어떤 목록은 항목 간 위계를 없애려고 모든 항목을 ‘하나’로 시작한다. 선서문 등이 그렇다. 9 목록은 한 해를 열어주고, 또 마무리해준다. 목록으로 정리한 소망이나 다짐으로 새해를 맞는 사람이 많다. 일설에 따르면 새해 소망 개수는 3, 5, 7, 11처럼 소수, 즉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뉘는 수로 정하는 게 좋다고 한다. 반면 연말을 장식하는 각종 목록은 흔히 10의 배수로 구성된다. 덕분에 우리는 한 해 최고의 음반 10장을 고민 없이 살 수 있고, 최악의 영화 10편을 안 본 척할 수 있다. 2010년 10대 뉴스로는 뭐가 꼽힐까? 은근히 바라는 게 있지만, 밝히지 않는 편이 안전하겠다. 최슬기·최성민/그래픽 디자인 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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