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먹이 번지듯이 이미지와 글자가 흘러가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 타이틀 시퀀스(왼쪽). 마음이 편안해지는 모션 그래픽을 사용한 렉서스 광고.
[매거진 esc] 첨단영상기술에 아날로그적 감성 살린 광고로 주목받은
모션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VKR 99.99
모션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VKR 99.99
1981년 8월1일 미국 음악방송 엠티브이(MTV)가 개국하면서 처음 전파를 탄 뮤직비디오는 ‘버글스’의 1979년 싱글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다. 음악방송의 첫번째 뮤직비디오는 역설적으로 라디오 스타를 그리워하는 곡이었다. 30년이 지난 2010년 지금의 주제곡은 ‘3D killed the 2D Star’가 아닐까. 영화 <아바타>의 성공이 말해주듯 30년 동안 영상은 그 질감과 움직임의 폭을 상상 이상으로 넓혔고, 움직이는 모든 영상에는 기술과 디자인이 스며 있다. 그렇다면 정말 라디오 스타는 30년 전 그때 그렇게 살해되고 말았을까?
동화책 같고 낙서 같은 그래픽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 전에 우선 모션 그래픽 스튜디오 ‘VKR디자인’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VKR디자인의 ‘VKR’는 ‘Video Killed the Radio star’의 약자다. “새로운 매체인 비디오가 라디오를 죽였다는 내용이지만 거꾸로 그게 암시하는 바가 있잖아요. 우리 역시 영상을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서 아날로그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회사 이름을 VKR라고 지었죠. 처음 회사를 만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날로그적 감성을 영상에 넣고 싶다는 마음만은 변치 않고 그대로예요.” VKR디자인 네 명의 공동대표 중 한 명인 김은아씨의 설명이다.
VKR디자인은 2004년 소박하게 시작했다. 미국에서 영상 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 엠티브이에서 모션 그래픽 관련 일을 하고 있었던 김은아 대표가 2003년께 당시 국내 유일의 모션 그래픽 회사였던 모션스팩토리에서 일을 하고 있던 김성태 대표를 만났고, 이후 케이블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던 정치열 대표가 합류하면서 의기투합해 작은 모션 그래픽 스튜디오를 꾸렸다. 회사를 세우고 나서 경영 쪽 전문가인 김성환 대표를 영입했다. 세 명의 디자이너와 한 명의 경영 전문가가 함께 회사를 꾸려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모션 그래픽을 하고 싶어서 친구들끼리 소모임 만들듯이 회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방송 영상 타이틀 제작 등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광고 관련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말 그대로 움직이는 그래픽을 만드는 모션 그래픽 디자인이 국내에서 영상의 한 영역으로 보편화하기 시작한 것은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영상을 전공한 이들이 꽉 잡고 있던 영상 관련 분야에 디자인을 전공한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게 최근이라는 얘기다. 광고 분야에서 모션 그래픽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도 VKR디자인이 설립되던 시기와 비슷하다. “그전에는 광고주들이 연예인과 화려한 배경이 등장하는 소위 ‘때깔 좋은’ 광고를 선호했어요. 그러다가 모션 그래픽이 쓰인 컴퓨터 기반의 광고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죠. 어린애들이 장난치는 것 같은 광고가 눈길을 끌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많았는데, 실질적으로 많은 시청자와 소비자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죠.”
눈을 끌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회사의 이름에 답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라디오 스타적인 감성, 그러니까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모션 그래픽에 담겨 있기 때문이란다. 이들이 제작한 광고를 보면 이 대답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책을 열면 팝업북처럼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현대카드 광고나 공책 한 귀퉁이에 낙서를 한 것 같은 에스케이(SK) 티스토어 광고, 동화책을 넘기는 것 같은 삼성 기업캠페인 광고, 한지에 먹이 번지듯 선을 따라 글자와 이미지가 흘러가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 타이틀 시퀀스를 보자. 여기에는 손으로 그린 그림 같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게 되는 정서가 들어 있다. 정치열씨는 이렇게 말한다.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막연히 미래적이고 화려한 영상이 주를 이룰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감성을 담아 친근하게 다가가는 영상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 끌어요.”
VKR디자인은 지난 6년 동안 위에서 말한 광고뿐 아니라 간단한 설명으로도 장면이 생각나는 수많은 광고의 모션 그래픽을 도맡아 했다. 광고뿐 아니라 영화 타이틀, 뮤직비디오 등 다른 분야의 모션 그래픽 프로젝트도 여러 차례 선보였다. 회사는 점점 커졌고 2D 그래픽과 실사 사진의 합성을 주로 했던 회사 ‘99.99’와 합쳐 ‘VKR 99.99’로 회사 이름도 업그레이드했다. 지금은 직원 25명이 일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모션 그래픽 스튜디오로 자리잡았다. 현재 VKR디자인이 하고 있는 모션 그래픽 영역은 크게 광고와 방송디자인, 인터랙티브 영상, 엑스포 등 이벤트 영상 이렇게 네 분야다. 그중에서 VKR디자인이 올해 주목하고 있는 분야는 인터랙티브 영상과 3D 등 새로운 영역의 영상 분야다. 자체 콘텐츠 제작도 점차 키워간다는 계획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커요. 또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미디어에 들어가는 콘텐츠 개발에 대한 욕심도 있고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보면 아마 이른 시일 안에 또 한 번의 빅뱅이 있을 것 같아요. 미디어와 사용자가 서로 반응하는 방법도 달라지고 그에 맞는 콘텐츠도 달라지겠죠. 최근 대기업의 3D 티브이 개발 등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어요. 3D 티브이가 나오고, 또 그보다 진일보한 미디어가 나오면 거기에 따라 광고 등의 콘텐츠도 제작 시스템부터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전부 달라질 테니까요.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VKR디자인도 일정 부분 자리하고 싶어요.”
인터랙티브, 3D 분야의 변화에 주목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도 VKR디자인의 원칙이나 다름없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여전히 유효할까? “그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직접 만지면서 느끼는, 육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감성만큼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네 명의 대표가 입을 모은다. 이제 처음에 던진 질문에 답할 차례다. 30년 전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진 그 라디오 스타는 정말 사라진 걸까? 아마도, 아닐 거다. 세상을 보는 유리창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도, 그 세상을 보는 눈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고민하는 영상 디자이너가 있는 한, 아직 그 라디오 스타는 살아 있다.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사진제공 VKR 99.99
팝업북을 이용한 현대카드 광고.
연필로 그린 일러스트 같은 느낌을 강조한 에스케이 티스토어 광고.
모션 그래픽 스튜디오 VKR 99.99를 함께 꾸려가는 김성태, 정치열, 김은아, 김성환 대표.(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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