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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음반을 찾는 사람들

등록 2010-06-02 19:17수정 2010-06-08 15:09

꿈의 음반을 찾는 사람들
꿈의 음반을 찾는 사람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중고 LP 명반을 찾는 이들은 누구일까
요한나 마르치, 그리고 안리스 슈미트 드 느뵈.

일반인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이 두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명성은 높았으나 음반 녹음은 적었던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마르치, 그리고 요절한 독일 첼리스트 느뵈는 당대에는 비운의 연주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의 엘피(LP) 초반(가장 처음 발매한 음반)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좋은 음반들로 꼽힌다. 마르치의 바흐 바이올린 무반주 파르티타 음반 석장짜리 세트는 나오기만 하면 500만원 이상이 기본이다. 느뵈의 바흐 무반주 첼로 음반은 1000만원을 호가할 정도다. 이베이 같은 경매 사이트에 이들 음반이 매물로 나오는 게 고작 1년 한두번인데도 수많은 전세계 엘피 마니아들은 음반이 나왔을 때 몇초 차이로 놓치지 않으려고 수시로 검색을 한다. 우리나라 주요 중고엘피 전문점들에도 이 음반들이 나오면 연락 달라며 부탁하고 기다리는 이들이 줄을 서 있다. 언젠가는 ‘꿈의 음반’을 갖게 되리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1948년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엘피는 오랫동안 음악팬들에겐 음악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80년대 초반 바늘 없이 디지털로 음악을 듣는 시디가 혁명처럼 등장했고, 10여년 뒤 엘피는 기술 흐름에 밀려 퇴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음반 매장에서 물러났을 뿐, 엘피는 지금도 사람과 음악을 이어주고 있다. 시디로는 나오지 않아 엘피로만 존재하는 음반을 찾는 이들, 당대의 음악을 당대의 연주에 당대의 저장매체로 듣는 매력에 흠뻑 빠진 음악팬들이 존재하는 한 엘피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태세다.


엘피 멸종이 엘피에 대한 열망 불러

〈LP 먼지 제거 순서〉 1. 엘피 표면을 물로 닦아낸다. 2. 찌든 때의 정도에 따라 알맞은 세척액을 고른다. 3. 세척액을 엘피 표면에 바른다. 4. 엘피를 세척 건조기인 VPI에 놓고 돌리면서 거품을 낸다. 5. 건조대에 엘피를 놓고 충분히 말린다.
〈LP 먼지 제거 순서〉 1. 엘피 표면을 물로 닦아낸다. 2. 찌든 때의 정도에 따라 알맞은 세척액을 고른다. 3. 세척액을 엘피 표면에 바른다. 4. 엘피를 세척 건조기인 VPI에 놓고 돌리면서 거품을 낸다. 5. 건조대에 엘피를 놓고 충분히 말린다.

클릭 한번이면 수백만곡을 내려받는 시대에 멸종된 엘피 음반을 수백만원씩 주고 사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묘한 노릇이다. 엘피의 종말은 엘피팬들에겐 오히려 엘피의 가치를 더욱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인터넷으로 전지구 차원에서 구매가 가능해지면서 팬들의 열망은 오히려 더욱 커졌다. 시디로 복각되지 않은 음반들의 가치가 치솟고, 마르치와 느뵈의 음반처럼 시디로 복각되었는데도 엘피 음반의 인기가 더 높아지기도 한다. 엘피 전성기에는 큰 인기가 없었던 음반이 뒤늦게 희귀 아이템으로 각광받는 경우도 있다. 엘피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적 현상들이다.

인터넷에서 인기 높은 엘피 가운데 하나가 아무도 예상 못했던 한국의 독특한 해적판 ‘빽판’이다. 외국 음반을 불법 복제한 한국의 ‘빽판’은 음반 재킷을 올컬러가 아니라 초록색이나 갈색으로 값싸게 인쇄한 것이 특징이다. 군사독재 시절 오리지널 음반에 수록된 곡들 일부가 검열로 국내 라이선스 음반에서 빠졌을 때 원판 그대로 듣고 싶어하던 음악팬들의 갈증을 채워줬던 것이 빽판이었다. 재킷 디자인이 조금이라도 ‘야한’ 음반들은 라이선스로 발매될 때 어김없이 디자인이 바뀌었지만, 빽판에선 그런 법이 없었다.

이런 빽판이 외국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다. 녹색, 갈색으로 찍은 재킷 자체를 흥미로워하는 구매자들이 많아 1달러부터 100달러까지 다양한 가격에 이베이 등에서 거래된다. 한때 딥 퍼플의 빽판이 가장 인기가 높았고, 요즘에는 AC/DC나 퀸, 아이언 메이든 등 록그룹들의 빽판이 꾸준하게 팔리고 있다. 검열제도가 낳은 문화 사각지대의 변종이 한 세대 뒤 독특한 대중문화 골동품이 된 것이다.

빽판과 함께 외국 록그룹의 한국 라이선스 엘피판들을 찾는 외국 음악팬도 많다. 80~90년대 국내 라이선스 음반 가운데에는 외국에는 없고 한국에서만 나온 것들이 상당했는데, 이런 음반들이 특정 가수들의 음반 전체를 모으는 외국 음악팬들에게 중요한 수집 대상이다. 또한 검열제도 탓에 국내에서 디자인이 바뀐 엘피들도 ‘디퍼런트 커버’(변형 커버)로 주목받는다. 아이언 메이든의 음반 <피스 오브 마인드>의 경우 원래 재킷에는 해골이 그려져 있는데 국내 검열 탓에 속지에 있던 이미지가 표지로 바뀌었는데, 이 때문에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별한 음반으로 아이언 메이든 팬들이 구입하고 있다. 이런 한국식 변형 엘피들은 우리 돈 2만~3만원에 팔린다.

한국에서 엘피 생산이 중단된 것은 90년대 중반, 어느새 10여년이 흘렀다. 귀한 줄 몰랐던 엘피들이 골동품처럼 변하면서 클래식에 견주면 싸구려 취급을 받았던 가요 엘피들이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도 엘피 단종 이후 등장한 주목할 만한 풍경이다.

한국 옛 가요를 재발견한 공의 절반쯤은 일본 마니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메모지에 어설프게 음반 이름을 적은 일본 관광객들이 서울시내 중고엘피점들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60년대 한국 록과 포크음악 엘피들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신중현 초기음반 한때 100만원 호가하기도

가요 엘피 역시 클래식과 마찬가지로 엘피로는 나왔지만 시디로는 나오지 않은 것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다. 신중현의 초기 음반, 그리고 잊혀진 가수 김정미 등 한국 사이키델릭 음반은 한때 100만원 이상으로 값이 뛰었고 지금도 내려올 줄 모른다. 임아영과 이정화, 그리고 포크 사단의 김민기·한대수·양병집과 김의철, 데블스와 라스트찬스 같은 그룹들의 음반도 최고 인기 품목들이다. 70년대 활동한 시각장애인 가수 윤용균, ‘불나무’를 부른 방의경의 엘피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 팬들이 모두 탐내는 인기 음반이어서 200만원 이상의 가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렇게 소외되었던 우리 옛 가요 엘피들에 대한 관심은 이제 50~60년대 트로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당시 ‘뽕짝’ 음반들은 5만~8만원 선, 특히 60년대 영화 포스터를 재킷 디자인으로 썼던 모음집들은 20만원 이상에도 거래되고 있다. 일부 소형 음반사들은 수백장 단위로 인기 엘피를 복각 판매하기도 한다. 정식 저작권 계약이 이뤄진 것은 아닌데 특별 소량생산이다 보니 나오자마자 절반 이상이 일본 마니아들에게 바로 수출되는 실정이다.

가요는 클래식과 달리 시디가 나온 뒤에도 저렴한 테이프가 주를 이뤘기 때문에 소량 발매된 시디들도 인기가 높아졌다. 2001년 나온 넬의 1집은 20만원 정도에 거래되고 있고, 옛 동물원 멤버인 이성우·윤도현과 김현성 등이 동인으로 활동했던 ‘종이연’ 시디도 최소 몇만원은 줘야 살 수 있는 음반이 됐다.

중고엘피 시장이 자리잡은 것은 인터넷이란 장이 펼쳐지면서 개인 소장자들이 ‘개미군단’처럼 등장해 거래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고음반가게를 뒤지며 자신만의 ‘꿈의 음반’을 찾는 이들은 물론 대부분 수집가가 아니라 음악을 즐기는 애호가들이다. 회현지하상가에서 중고엘피점 클림트를 운영하는 김세환(49)씨는 값비싼 고가 엘피를 찾는 이들은 결코 돈이 많은 호사가들이 아니라고 잘라말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엘피판을 못 산다. 이거 말고도 할 게 많으니까. 골프도 치고 아파트 평수도 늘려야 하고…. 비싼 엘피 사는 사람들은 다른 것 안 하고 아껴 모은 돈으로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들이다. 음악이 좋고 음반 자체가 좋아서 언젠가는 원하는 판이 나오기를 기다릴 줄 아는 이들이다.”

엘피 음반을 모으고 사고팔기도 하는 권태주(44)씨는 시디나 엠피3보다 엘피가 원하는 음악을 찾기에 훨씬 낫다고 조언한다. 몇만원씩 하는 음반을 사는 사람은 일부일 뿐, 대다수 엘피팬들은 음반가게에서 시디로 사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음악을 비싸지 않게 중고엘피로 구할 수 있어서 즐긴다는 것이다. 엘피 중고시장이 아직 정착 단계다 보니 인기 음반들에 가격 거품이 끼어 있는데 앞으로 엘피 시장이 더 활성화되려면 합리적인 가격과 정보 체계가 갖춰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권씨는 지적한다.

디지털 시대, 음악은 아날로그의 길에서도 흐른다. 에디슨이 음악을 저장하는 법을 찾아낸 이래 엘피는 가장 오래 음악을 담아왔고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만의 ‘꿈의 음반’을 찾는다. 1000원짜리든 1000만원짜리든 그 한 장이 다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꿈의 음반이다. 진정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엘피의 시대는 결코 저물지 않았다. 이 시커먼 비닐덩어리가 앞으로 최소 한 세대 정도는 너끈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엘피팬들은 입을 모은다.

수십만원대에 거래되는 클래식 명반들

수십만원대에 거래되는 클래식 명반들
수십만원대에 거래되는 클래식 명반들

1. 페터 마크가 지휘한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가 50년대 녹음한 ‘한여름밤의 꿈.’ 명반 중의 명반으로 꼽힌다.

2.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 지네트 느뵈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콘체르토’.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느뵈가 남긴 몇 안되는 음반으로 인기가 높다.

3. 데카에서 50년대 나온 ‘무도회의 초대’.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의 대표적 무곡 연주를 모았다. 최고의 발레 지휘자로 꼽히는 알베르트 볼프가 지휘한 파리 콩세르바투아르 오케스트라 연주.

4. 프랑스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고르토의 음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고르토는 파블로 카살스, 자크 티보와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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