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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아닌 척이 더 힘들었다

등록 2011-01-06 11:14

[매거진 esc] 김조광수의 ‘마이 게이 라이프’
사람들이 종종 내게 묻는다. “게이라고 밝히고 사는 거 힘들지 않아요?” 난 바로 이렇게 대답한다. “게이가 아닌 척하고 사는 게 더 힘들었어요.” 정말 그렇다. 게이라고 밝히고 사는 것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숨기고 살 때보다는 더 행복한 게 확실하다. 혹시 누군가 내가 게이인 걸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던 그런 날들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순간순간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가 있었는데 그건 치욕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게이가 아니면 안 될까, 이성애자로 살고 싶다’고. 하지만 그것만큼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커밍아웃을 하고 나면 여러 가지가 변한다. 그중에서 제일 확연한 건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동성애자들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주류의 편견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존감이 생기면서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스스로 떳떳한 사람이 된다는 것,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소중한 것인지 커밍아웃 이전에는 몰랐다. 다른 것을 더 꼽자면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 어제까지만 해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나를 멀리하기도 한다. 난 그냥 예전처럼 아무 변화가 없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는 목욕탕에서 영화를 만드는 후배를 만났다. 반갑게 악수를 했는데 이 녀석 내가 자기 벗은 몸(그중에서도 특정한 부분)을 볼까봐 두려웠는지 어물쩍 자리를 피하더니 어느새 가버리고 없었다. 게이들이 남자라면 다 침 흘리고 훑어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밝혀둔다. 그리고 그 녀석에게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싶다. 나도 보는 눈이 있단다. 그리고 넌 내 ‘식성’(이상형을 뜻하는 게이들의 은어)도 아니라구!

씁쓸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며칠 전에는 모르는 사람한테 이메일이 하나 왔다. 열어 보니 고등학교 동기가 보낸 것이었다. 우연히 내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며 학교 다닐 때 “계집애 같다”고 놀려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고등학교 때는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친구인데 27년 만에 불쑥 그런 편지를 보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술 한잔하기로 약속했다.

때때로 이메일이나 쪽지로 나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는 글을 보내오는 이들도 많다. 내가 어떤 이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나 동성애자예요.” 이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아니, 그런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이길 바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그런 세상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꼭 올 거라 믿는다. 주변에 혹시 어렵게 ‘나 동성애자예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면 좋겠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저 예전처럼만 대해주면 세상은 좀더 따뜻한 세상이 될 것이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그런 세상 말이다. 21세기가 시작되고 10년이 지난 새해의 소망이다.

김조광수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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