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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꽃 속 찬란한 슬픔

등록 2011-07-14 11:34

[매거진 esc] 밥스토리-밥알! 톡톡!
훈련병 시절은 누구나 춥고 배고프다. 나의 1986년 해군훈련소 시절 또한 훈련 빼고 나면 먹을 것에 대한 궁리 외엔 생각할 겨를이 없는 짐승의 시간이었다. 하루는 훈련병끼리라면 꿈도 못 꿀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사격을 잘한 덕분에 훈련을 빼줘서 홀로 내무반을 지키게 됐다. 일반병들 틈에 끼어 밥을 한번 타먹은 뒤 또 잽싸게 줄을 서서 목구멍이 넘실대도록 밥을 퍼 넣었다. 몹시 행복했으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내무반으로 돌아가려고 연병장을 절반 정도 건너갔을 때였다. 식도 근처에서 울렁거리던 엄청난 양의 밥알들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다시 주워 먹을 수 없는 슬픈 꽃송이들을 바라보며 울컥 눈물이 났다.

두 달여 뒤 부대 배치를 받고 나자 기아상태는 벗어날 수 있었다. 25t 경비정에 배치된 내 신세는 멋있는 마도로스이거나 바다를 지키는 늠름한 군인도 아닌 부엌데기에 불과했다. 10명의 승선인원 가운데 병사는 4명뿐이었다. 막내가 당연 취사병이었다. 후임병 오기를 기다리다 목이 부러지기 직전이었던 선임병은 딱 하루 밥과 반찬 만드는 일을 가르쳐주더니 취사장에서 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군대인지라 그 다음날부터 하루 세끼 밥과 찌개 외에 10가지의 반찬을 만들었다.

기관총 연발사격으로 갑판이 사정없이 떨리고 바로 그 밑에서 요리하던 내 몸도 밥솥과 함께 떨리던 어느 날이었다. 오전 훈련이 끝나면 바로 낮 12시에 점심을 먹어야 했는데 그날따라 밥물을 늦게 넣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식탁에 둘러앉은 뒤에도 압력밥솥의 추는 계속 돌고 있었다.

시간은 돌고 돈다지만 오! 내 마음을 모르고 뱅뱅 도는 야속한 추여! 선임병들은 도끼눈으로 쳐다보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만 연발했으나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초조함이 극에 달한 나는 급기야 시간을 거역하여 판도라의 상자를 강제로 열어젖혔다. 내 인생의 6·25였다. 압력밥솥은 뻥튀기 기계처럼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밥알들은 <웰컴 투 동막골>의 한 장면처럼 사방천지로 아름답게 튀어 올랐다. 군침을 흘리며 밥솥 뚜껑이 열리기만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기이하고도 어이없는 상황에 넋을 잃었다. 압력밥솥 옆으로 몇 무더기의 밥 덩어리들이 인절미처럼 널브러지고 사방에 밥꽃이 피어 붙었다.

밥은 눈앞에 있었으나 사라져 버렸고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존재와 밥 사이에서 절망했다. 사람들은 하얀 꽃밭에서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몸과 얼굴에 붙은 밥꽃들을 서서히 떼어내며 다시 갑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보았다. 먹잇감을 쫓다가 지친, 오래도록 굶은, 늙은 사자의 눈물을.

이철영/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주제 | 밥에 얽힌 추억담, 밥과 관련한 통쾌, 상쾌, 유쾌한 이야기.

분량 | 200자 원고지 8장 안팎

응모방법 | <한겨레> 누리집(hani.co.kr) 위쪽 메뉴바의 ‘esc’를 클릭한 뒤 ‘밥알! 톡톡!’에 사연과 사진을 올려주시거나 한겨레 요리웹진 끼니(kkini.hani.co.kr)의 ‘커뮤니티’에 사연을 올려주세요.

상품 | PN풍년 압력밥솥 ‘스타켄’ 시리즈 1개

문의 |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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