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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 오르가슴…짧은 환희 질긴 미련

등록 2011-11-17 15:04

[esc] 김도훈의 싱글 앤 더 시티
맥북에어와 나눈 첫사랑, 그러나 내 육신을 붙들어맨 옛사랑 PC의 익숙함

맥북에어를 샀다. 피시(퍼스널 컴퓨터)와의 오랜 결혼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이놈의 피시라는 건 인류 최악의 물건 중 하나로 역사책에 기록되는 게 옳다.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방법은 없다. 1년에 몇번은 공포의 파란 화면을 면전에 들이밀며 투정을 부린다. 부팅 속도는 날이 갈수록 느려져 3년 정도 지나면 늙은이 소변 보는 소리를 내며 끝없이 부팅만 돌린다. 바이러스 없는 맥이라면 더는 성질을 긁지 않는 편안한 동거인이 되어 줄 것이다. 심지어 시기도 근사했다.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 중 하나인 맥북에어를 구매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맥북에어가 도착한 날엔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패키지를 열어젖힌 다음 얇게 코팅되어 있는 비닐을 벗겨내자 나는 거의 테크놀로지적 오르가슴을 느낄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맥북은 처음 패키지를 뜯으면 특유의 냄새가 나.” 코를 갖다 대자 정말로 냄새가 났다. 그게 무슨 냄새였냐면… 흐음.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라 글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맥북에어의 패키지를 벗기면서 진심으로 첫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맥북에어가 수줍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부턴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 시작되는 거예요. 옛사랑 피시 따윈 잊어버려요. 달링.

첫사랑의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밀린 작업을 해보겠노라며 맥북에어를 켰다. 그때부터가 난관이었다. 내 육체와 정신은 이미 15년 넘게 사용해 온 피시의 윈도시스템에 완벽하게 잠식당한 상태였다. 맥북에어를 사용하려면 간단한 문서 작업 방식 하나도 완전히 새롭게 배워야만 했다. 사진 하나를 메일에 첨부해서 보내려다 여러번 실패한 나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토록 편하다는 맥 시스템(맥 OS)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1시간 넘게 씨름하다 기진맥진한 채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피시를 책상에 다시 올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내 몸은 더 편하고 아름다운 맥북에어를 거부하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심지어 새로운 것이 훨씬 더 편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몸은 오래되고 익숙한 것을 끝끝내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정치적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맥북에어를 책상 위에 올렸다. 몸은 보수적으로 늙어가지만 머리만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내 맥북에어에 몸과 마음의 힘이 실린 첫번째 클릭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개인에게는 작은 한걸음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 되리라.

글·사진 김도훈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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