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어릴 적 조숙한 어린이였던 저에게는 스스로 정한 불문율이 하나 있었습니다. 산타에 관해서 부모님께 절대 묻지 않는다는 거였죠. 엄마,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 있나요? 아빠,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 아니에요? 묻는 순간 성탄절 아침 머리맡에 놓인 근사한 포장의 선물은 사라지게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공식 어린이 시절의 마감인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알차게 산타의 선물을 챙겼습니다. 부모님은 막내딸의 ‘꼼수’에 질렸는지 마지막 산타 선물을 성탄절 아침 저의 손에 아무 말 없이 쥐여주시더군요.
하지만 어린이에게도 할 말은 있습니다. ‘울면 안 돼’라는 노랫말이 알려주듯이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는 섬뜩한 위협조로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산타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10시 넘어서 자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신다” “야채 반찬을 안 먹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안 오실 거야” 등등 모두가 산타를 동원한 억압과 통제 육아를 하고 있더군요. 심지어 한 친구는 1년 내내 산타 동원 위협을 가한 결과 이제 다섯살 된 아이가 산타 이야기만 나오면 “선물 필요 없어, 산타 가버려, 산타 너무해!”라며 경기를 일으키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산타와의 파탄이라는 초유의 크리스마스 블랙코미디 아동극입니다.
산타로부터 선물을 기대하지 않는 나이가 되면서 크리스마스는 어쩐지 남의 집 잔치처럼 근사해 보이기는 하는데 닥치면 막상 그렇게 즐겁지는 않은 이벤트입니다. 이때 친구들을 불러 작은 파티라도 하는 건 어쩌면 막상 아무것도 아닌 날에 느껴지는 쓸쓸함에 대한 위로인 듯싶습니다. 는 조촐한 파티를 따뜻하게 덥혀줄, 허기진 우리의 위장과 마음을 덥혀줄 소박한 음식 선물을 제안합니다. 맥주병을 들고 기다리는 친구들 앞에 맛난 음식을 내놓는 당신이 산타가 아니라면 누구겠어요?
김은형 팀장 dmsgu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