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맛을 타고
겨울의 문턱에서 혼자 여행을 떠난 곳은 전북 남원이었다. 남원역에서 내려 시내에 이르자 시장이 나타났다. 많은 생선이 진열되어 있는 어물전을 통과하자 지리산에서 채취한 갖가지 약초를 파는 곳도 나오고, 목기나 칼 같은 남원의 명품을 파는 곳도 나왔다. 그곳도 지나자 채소를 올망졸망 꾸려 좌판을 벌인 할머니들이 보였다.
나는 시장에 가면 왜 그렇게 사야 할 게 많은지 모르겠다. 이 할머니 것도 팔아줘야 하고, 저 할머니도 맘에 걸리니 뭔가는 또 사줘야 한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다. 시장에는 장꾼을 위해 싸면서도 맛있는, 허름한 식당이 있기 마련이다. 여러 골목을 돌다가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한 할머니한테 “할머니, 여기 음식 맛있게 하는 집이 어디예요?”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앞집을 가리키며 “이 집! 내 것 시켰는데 하나 더 시켜줄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미처 말귀를 알아듣기도 전에 할머니는 1인분을 더 시켰다. 좌판에서 겸상을 하자는 것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거절하고 말고도 없었다. 나는 ‘별 경험을 다 하게 생겼네요!’ 생각하면서 쪼그리고 앉았다. 밥상을 기다리는 동안 토란대, 밤채 말린 것, 생도라지를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두 사버렸다.
조금 뒤 양은쟁반에 2인용 식사가 담겨 나왔다. 시장 좌판에 철퍼덕 주저앉아 기우뚱거리는 쟁반을 손으로 받치고 할머니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쟁반에는 소복한 흰쌀밥에 아욱국, 토란조림, 갓김치, 파김치, 생채, 시금치무침, 무 부침개(무전), 갈치속젓이 나왔다. 1인분에 3000원이란다. 나는 “이것 서울에서 먹으면 6000원이에요” 했다. 반찬은 다 맛있었다. 할머니도 식성이 좋으셨다. 올해 80살이라고 하시는데 나보다 밥을 더 많이 드셨다. 할머니는 반찬 중에 전을 제일 맛있게 드셨다. “할머니, 이거 무로 만든 거예요?” 했더니 “무를 삶아서 부친 거야” 하셨다. 무전이라는 걸 난생처음 먹어봤다.
밥을 먹으면서 할머니는 어디에서 왔는지, 아이는 있는지, 왜 혼자 다니는지 등을 물으셨다. 아직 미혼이라고 하자 “그래, 시집 안 가면 더 자유롭긴 해” 하셨다. 3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혼자 사신다고 하는데 “갈 때가 돼서 간 걸 어떻게” 하시며 담담한 표정이셨다.
식사를 끝낼 무렵 할머니는 돌연 “아가씨, 같이 밥 먹어줘서 고마워!” 하셨다. 이것 역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다. 이제야 왜 할머니가 같이 먹자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잠깐이나마 할머니의 말벗이 되었다니 참 다행스럽다.
김예옥/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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