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독자사연 사랑은 맛을 타고
한 1년 전쯤 일이다.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그때의 이야기. 우리 집은 돼지를 천 마리 가까이 기르는 농장을 운영한다. 농장 근처에 작은 논을 마련해 몇 해 전부터는 쌀농사도 짓고 농장 앞 텃밭에 고추며 감자, 고구마, 땅콩, 온갖 푸성귀를 농사지어 가족들 밥상을 차려낸다.
봄이 오면 온 천하가 나물들로 뒤덮인다. 냉이는 지천으로 흔해 조금만 손을 움직이면 시원한 냉잇국에 냉이무침이 뚝딱 만들어진다. 여린 민들레 잎사귀를 뜯어다가 삼겹살 지글지글 구워 쌈을 싸 먹으면 그 또한 일미다. 여름이면 풋고추 뚝뚝 꺾어다가 된장에 찍어 먹고, 장날 사다 뿌려놓은 상추 솎아서 밥 싸 먹고, 감자 캐고 옥수수 따서 큰 솥 걸고 푹 쪄 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다. 한 해 농사지어 잘 쟁여둔 벼를 2주 정도 먹을 만큼만 바로 정미해서 지어 먹는 밥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차지고 구수하다.
이렇게 밥 잘 먹는 우리 식구들이 밥맛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재작년 겨울 지독한 구제역 때문에 농장 안에 콕 갇혀서 보낸 3개월이다. 방역선이 쳐지고 플래카드가 농장 진입로를 가로막고 나니, 마치 사회로부터 격리당하는 것 같은 낯섦과 구제역이 우리 농장에도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온 가족은 힘들어했다. 출하가 막혀 당장 수입도 없고 하루에도 몇 번씩 돈사를 소독하고 치우는 고된 노동은 계속되었다. 공연히 걱정만 쌓여가고 우울감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도시락을 예쁘게 싸는 아가씨가 나와서 밥에다가 채소랑 김이랑 온갖 것들을 넣어 곰과 토끼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그래, 바로 저거야.” 주방으로 간 나는 우선 고슬고슬한 밥에 간장하고 참기름을 넣어서 조물조물 버무리고 뭐 장식할 것이 없나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장고에 있는 것이라고는 김치가 전부고 그 흔한 달걀 하나, 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김치와 감자를 볶아서 윤기나는 밥을 섞고 접시에 담아 꽃 모양, 별 모양, 하트 모양 등 낼 수 있는 모양이란 모양은 다 냈다.
오전 축사 일을 마치고 축 처진 어깨로 내려온 가족들에게 멀건 된장국과 최선을 다해 예쁘게 꾸민 볶음밥을 내놓으니 다들 “이게 뭐래?” 하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린다. 그래도 그렇게 한번 웃고, 그렇게 한번 기운 받으며 우리는 혹독한 그해 겨울을 잘 이겨냈다.
박은희/충북 청원군 오송읍 (연락처를 문의 메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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