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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농활

등록 2012-04-11 18:23수정 2012-04-13 15:17

[매거진 esc] 독자사연 사랑은 맛을 타고
군대 제대 후 다니던 대학에 복학을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이었고, 기숙사를 얻지 못해 자취나 하숙을 해야 했다. 비용이 부담되어 방 하나를 얻어 친구와 같이 사는 것으로 자취를 시작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혼자 사시면서 농사도 지으시고, 몇 개의 방에 하숙생을 받아 생계를 이으시는 분이었다. 자취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친구와 늦잠을 자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께서 여러 방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손자들~ 아침밥 먹어~!”라며 깨우시는 게 아닌가! ‘하숙도 아닌데 밥을 다 주시려나?’ 싶어 밥 먹자고 친구를 깨워 문을 열고 나갔다. 옆방 선배에게 “형, 같이 밥 먹으러 가요. 할머니께서 밥 주신대”라고 하니 “가지 마라, 후회한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밥을 주신다는데 왜 안 가?’ 의아해했다. 나와 친구는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밥상을 보고서야 왜 선배 형이 가지 말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밥상에는 사극이나 혹은 제삿날에나 가끔 보았던 큼지막한 놋쇠그릇에 고봉밥이 담긴 ‘머슴밥’ 세 그릇과 미역국과 김치 등 반찬이 있었다. 아침부터 그 많은 밥을 먹자니 너무 부담스러웠지만, 이미 밥 달라고 들어와 버렸으니! 게다가 키가 150㎝가 될까 말까 한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께서는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하시며 쓱싹쓱싹 밥을 비우고 계셨으니 젊은 우리가 밥을 못 먹겠다고 하기에는 이미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미역국과 김치, 나물 반찬 등은 맛있었지만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밥은 많았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는 건지 밀어 넣는 건지 아리송한 상태에서 절반쯤 먹었을 때였다. 할머니께서는 “손자들, 밥 더 줄까?” 하시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셨다. 이어서 우리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바닥을 보시며 마치 혼잣말을 하시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오늘 논에 김을 매야 하는데, 사람이 없네”라고 말이다.

어쩌랴! “저희가 좀 도와 드릴게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 강의도 못 들은 채 계획에 없던 ‘농활’을 해야 했다. 그날 엉뚱하게 일을 하긴 했지만 방값도 싸게 받으시는데다 정이 많으셔서 농사지은 맛난 수박도 주시고, 직접 빚은 막걸리도 주시는 등 인심이 좋은 분이셔서 인기가 많았다. 할머니의 고봉밥을 함께 나눈 친구는 박사학위를 얻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나도 직장을 구해 잘 지내고 있는데, 가끔 대학 생활을 떠올릴 때면 그때 일이 기억나곤 한다.

고재현/인천 남동구 서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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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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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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