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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유전자는 어쩔 수가 없네”

등록 2012-05-30 17:05수정 2012-08-09 14:22

박미향 기자
박미향 기자
[매거진 esc] 인간 반전
기자에서 이탈리아 요리사로 전업해 글쓰기·요리 병행하는 박찬일 셰프

그를 새삼스레 이 자리에 세우는 것은 다소 민망한 일이다. 그것은 조용필에게 ‘당신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다. 그의 프로필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한겨레>에 오랫동안 연재를 했고 연재한 글을 묶어 책을 냈고, 각종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0여년을 살았다. 그 자신은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을 끔찍이 싫어한다고 하지만, 기자 출신 이탈리아 요리사에게 쏟아진 세간의 관심은 생각보다 지대했다. 그는 ‘글 쓰는 요리사’라는 수식어를 달고 13년간 주방 안주인으로 살았다. 청담동과 신사동 가로수길을 거쳐 현재는 홍대앞에서 레스토랑을 운영중이다. <주부생활>과 <우먼센스> 기자로 남의 집 담벼락을 타넘으며 열정적으로 취재를 하던 남자가 어찌하여 밀가루 반죽을 열심히 치대며 파스타를 만들고 스테이크를 굽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미안하지만 궁금증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지 않았다. 첫번째 직업의 굴레에서 열심히 도망치려고 했지만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온 박찬일 셰프의 속사정이 내심 궁금했다. 그동안 인생 반전을 시도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봤지만, 알고 보면 완벽한 인생 반전을 이룬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첫번째 직업은 분명하게 갈라놔야 할 인생의 경계선이 아니라, 두번째 직업을 빛내주는 양념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찬일 셰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 대신 칼과 국자를 잡겠다고 떠난 이 남자는 현재, 글도 쓰고 요리도 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두 가지 명함을 동시에 쥐락펴락하는 ‘욕심 많은’ 반전 인생이다.

“최초의 유전자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조류가 알에서 나와 처음 본 사람을 어미 새로 인식하는 것처럼, 나에게 글쓰기도 딱 그렇다. 나는 요즘 글을 쓰는 게 훨씬 재미있다. 글이라는 게 인생을 어느 정도 살고 세상도 좀 쳐다본 다음에 써야 재미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요리는 별로 재미가 없다.”

뜻밖의 발언이다. 요리사가 글쓰기의 재미를 늘어놓는 것으로 모자라, 요리의 재미없음을 한탄한다. 지금 그는 요리사로서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일까. “심리적으로 요리가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라, 음식을 계속 만들어서 ‘팔아야 하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거다. 대중적으로 많이 팔기 위해서는 조미료도 쓰고 좀더 야박하게 굴어야 할지 모른다. 근데 내 습성이 그렇게 못한다. 요리를 대하는 마음이 연애에 실패한 사람의 마음 같다. 내 마음을 너무 몰라주네 싶은 심정이랄까.”

profile

박찬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수료. <주부생활> <우먼센스>에서 기자로 일하던 중 이탈리아 영화에 매혹되어 무작정 이탈리아 요리학교로 떠났다. 시칠리아에서 연수과정을 거친 후 서울 청담동에서 셰프 생활 시작. 현재 홍대앞에서 ‘라꼼마’ 레스토랑을 운영중이다. 저서로는 <와인 스캔들> <보통날의 파스타>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어쨌든, 잇태리> 등이 있다.

“요리를 대하는 마음이
연애에 실패한 사람 같다
내 마음 너무 몰라주네”

“100살까지 사는 시대
한 직업으로 20년 산다면
인생 삼모작도 준비해야”

그는 요즘 홍대앞에서 젊은이들의 입맛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주로 소스의 맛에 익숙하다. 화려한 맛을 좋아하는 편이다. 홍대 주변에서 밥 먹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이 무엇인지 그도 대충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요리 대신 자연의 맛을 살린 요리를 고집한다. 요리 스승인 시칠리아 주방장 주세페 바로네의 요리철학을 가슴 깊이 새기며 요리를 내온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는 재료를 가지고, 가장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요리를 만든다.”

이런 요리철학을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혀’의 속성 때문이다. “우리 몸에서 제일 늦게 성장을 시작하는 기관이 혀다. 혀는 몸의 성장이 끝난 후 비로소 성장이 시작된다. 그래서 젊을 때는 대부분 화려한 맛을 좋아하다가 나이가 들면 점점 재료 본연의 맛을 찾게 된다. 이것이 대중성과 요리에 대한 내 고집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다.”

그는 최대한 절제하는 요리를 좋아하고, 최대한 치장하지 않는 글을 선호한다. 요리하지 않는 요리사, 부사를 최대한 자제하는 칼럼니스트다. “겨자 잎이나 쌀을 오래 씹으면 어느 순간 본연의 맛이 나온다. 그 맛이 좋다. 혹은 친구가 캔 바지락에 엄마가 담근 된장을 맑게 풀어낸 요리 같은 것.” 그의 요리와 글은 바로 이런 맛이다. 억지로 치장하지 않고, 함부로 뽐내려 하지 않는다. “첫번째 직장인 <주부생활> 편집장에게 배운 거다. 법정 스님 최초 인터뷰 같은 걸 척척 해내신 분이었는데, 취재도 잘하셨고, 글도 정말 잘 썼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는데 가슴을 치는 글을 쓰셨다. 그분이 늘 강조하던 말이 있다. 사람을 대할 때 절대 거만하지 말고, 배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그는 글 쓰는 첫 순간에 최고의 스승을 만났고, 요리를 하는 첫 순간에 또 최고의 스승을 만난 것처럼 말했다. 그의 인생에는 왜 이토록 큰 행운이 따라다니는 것일까 궁금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사실 이건 행운이 아니라 ‘재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그는 남의 인생에서 배울 점을 잘 찾아내고, 이를 자기 것으로 담백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재능을 더 추가한다면, 그건 바로 농담의 재능이다. 겉모습은 중후한 아저씨 같은데, 말이나 글, 심지어는 요리에조차 남을 배시시 웃게 만드는 매력을 숨겨 놓는다. 스스로 자학개그라고 말하는 이 웃음 코드는 그의 중후한 외모와 묘하게 배치된다. 반전은 외모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반전 유전자를 타고난 박찬일 셰프는 인생 이모작으로 모자라 삼모작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평생 한가지 일로 먹고살 자신이 없으면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게 좋다. 인생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하면서 살아야 한다. 요즘 세대는 별일 없으면 100살까지 사는 세대다. 한 직업으로 2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삼모작까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인생 삼모작에 도전하고 싶은 눈치다. 글과 요리 말고 또 무엇에 관심이 있냐고 물으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돌변한 그가 되묻는다. “나도 빨리 찾고 싶다. 어디 재미있는 일 없나?”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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