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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창부수

등록 2012-06-20 17:36

[매거진 esc] 독자사연 사랑은 맛을 타고
마누라가 오미자 농사를 짓겠다고 덤빌 때 알았어야 했다. 아니 마누라가 촌에서 자랐다고 할 때, 자기는 농부가 되고 싶다고 할 때, 자기 유전자 속엔 경작 본능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때, 신혼여행 대신 장인어른 양파밭에서 양파 수확을 돕게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지 않았다. 솔직히 벼와 보리도 구분 못 한다. 촌에서 자랐다고 뻥을 친 건 마누라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다. 마누라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서 유기농사를 짓는 오미자 생산자다. 90㎞를 왕복하는 열정이 대단하다.

그녀가 천 평 농사를 시작하면서 구박이 심해졌다. 내가 사고를 좀 치기는 했다. 마누라가 멧돼지 내려오고 그늘져서 심어봤자 안된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고구마를 심었다. 결국 고구마는 8천원 하는 모종 심어 아기 주먹만한 것 세 개를 얻었다. 마누라가 심은 부추나 금지옥엽으로 기르던 은방울꽃도 잡초인 줄 알고 다 뽑아 버렸다. 날 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나도 무진장 노력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기농사는 풀과의 전쟁인데 풀이 미친 듯이 자란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게 무서울 지경이다. 서툰 일을 하다 보면 손을 베고 물집이 잡힌다. 솔직히 들에서 가끔 보는 뱀도 너무 무섭다.

그 옛날 연애시절이 그립다. 마누라는 내가 얼마나 지적인지, 고운 내 손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가진 게 책뿐인데도 그 점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두 잊어먹었다. 요즘은 “가뜩이나 좁은 시골집 책으로 채울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엄포부터 놓는다. 급기야 농사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나를 대신해 ‘돕는 자’ 300인을 모았다. “아예 영화를 찍어라” 비웃었지만 아랑곳없다. 작년에 우리집에는 ‘돕는 자’만 100명도 더 왔다. 이제 마누라는 아예 도시생활을 내게 맡기고 귀농을 하고 싶어한다.

요즘 나는 입에 달고 사는 소리가 있다. “제발 나한테 농사일만 시키지 말아주라. 대신 밥은 해줄게.” 밭의 흙을 잔뜩 묻히고 들어온 마누라, 따가운 햇볕을 받아 까맣게 변한 마누라를 위해 현미찰밥을 만든다. 부지런하고 튼실한 농사꾼 대신 밥 잘하는, 책까지 읽어주는 남편으로 점수를 따볼 생각이다. 연애시절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 들에서 온 마누라는 별 찬 없이 밥을 먹고 “아, 황후의 밥이다” 하고 웃는다. 작전이 서서히 먹혀가고 있다.

김성휘/대전시 유성구 어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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