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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쯤 캐나다의 휘슬러 스키장에 놀러 갔다가 저랑 동갑내기 한국인 남자아이를 만났습니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소년처럼 동안이었던 그 친구는 그곳에서 당시 한국까지는 그 바람이 불지 않았던 스노보드 강사 일을 하고 있었죠.
한국인이 세계 3대 스키장이라고 하는 외국의 거대한 스키장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것도 당시로서는 낯설었던 ‘이국 문물’인 스노보드를 가르치다니 신기하고 멋져 보이더군요. 더 멋진 건 한해의 절반은 이곳에서, 계절이 바뀌면 오스트레일리아로 옮겨 그곳에서 나머지 절반을 지낸다는 이 친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곳에서도 물론 스노보드 강사를 하면서 말이죠. 학창시절 지독한 말썽꾸러기에 전교 꼴찌였다는 그는 여행을 하다가 이처럼 미치도록 좋아하는 일을 발견해내서 삶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번 커버스토리에 소개한 서핑 마니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친구가 떠올랐어요. 다니던 직장까지 때려치우고 아예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서핑에 몰두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부모 세대의 관점에서는 무모하기 짝이 없겠지만 행복하기 위해서 바치는 열정이 그들의 그을린 피부만큼이나 건강해 보입니다. 회사도 무엇도 나의 미래를 약속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일자리만큼이나 중요한 건 나의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힘이 아닐까요?
직접 파도에 뛰어들 자신은 없지만 이번 휴가 때 서퍼들이 모인다는 강원도 양양 앞바다에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한 서핑의 스펙터클을 보고 와야겠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노랑머리 소년으로만 기억되는 휘슬러의 그 친구는 지금쯤 어떻게 살까요? 어쩐지 저처럼 그냥 그런 중년의 초입에 서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김은형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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