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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속 게으른 여행자의 도시

등록 2012-08-08 17:29

블레드 호숫가에서 블레드 성을 올려다보는 사람들
블레드 호숫가에서 블레드 성을 올려다보는 사람들
[매거진 esc] 여행
노중훈 여행작가가 추천하는 슬로베니아 블레드와 피란
크로아티아 옆 슬로베니아
조용하고 오밀조밀
걸으면서 도시 매력 만끽

이스트라반도 휴양도시 피란
시간 천천히 가는 듯 여유
인심도 풍경만큼 훈훈하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와해되면서 생겨난 독립국가들 가운데 여행지로서 가장 유명한 곳은 크로아티아다. 해마다 유수한 매체들이 선정하는 ‘죽기 전에 꼭 가볼 곳’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맞댄 슬로베니아 역시 그에 못지않은 매력을 간직한 나라다. 오밀조밀한 도시는 사랑스럽고, 바다를 끼고 있는 휴양지는 나긋하다. 관광 인프라도 일반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 갖춰져 있다. 크로아티아의 위세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여행자들의 선택을 받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슬로베니아의 전체 면적은 한반도의 11분의 1에 불과하다. 좁은 국토에 들어선 도시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체구가 왜소하다. 슬로베니아의 수도이자 대학 도시인 류블랴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교통수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두 발로 걸어서 도시의 세밀한 부분까지 챙겨볼 수 있다.

아드리아 해를 향한 구애를 멈추는 법이 없는 이스트라 반도의 휴양도시들은 더없이 낭만적이다. 슬로베니아 사람들 역시 웅숭깊은 슬로베니아의 풍경을 닮았다. 마음 씀씀이부터가 남달라서 처음 보는 나그네도 마치 오래 알고 지내온 친구처럼 살갑게 맞아준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슬로베니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류블랴나를 떠나 호숫가 마을인 블레드로 향했다. 슬로베니아 최고의 관광 명소로 꼽히는 블레드는 작으면서도 갖출 것은 다 갖춘 마을이다. 아주 깜찍하다는 뜻의 형용사 ‘앙증맞다’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물비늘을 일으키며 반짝이는 블레드 호수와 그 호수에 살포시 떠 있는 손바닥만 한 블레드 섬, 그리고 호수를 병풍처럼 감싸는 알프스산맥의 산자락이 삼위일체가 되어 완벽한 풍경화를 빚어냈다.

와인 만드는 법을 설명해주고 있는 수도사
와인 만드는 법을 설명해주고 있는 수도사
블레드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물가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전통 나룻배 플레트나(Pletna)에 올라탔다. 배가 출발한 지점에서 배가 닿는 지점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물결과 바람결을 거슬러 가야 하기에 배는 느릿하게 나아갔다. 양손에 노를 쥔 사공은 온몸의 근육을 남김없이 사용해가며 배를 조금씩 전진시켰다. 사공은 노 젓는 일에 고요히 집중했다. 플레트나를 운행하는 일은 금녀의 영역이다. 18세기부터 이어진 이 뱃사공 일이 오직 남성에게만 허락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공의 숨이 턱에 차올랐을 무렵 배가 섬의 선착장에 접안했다.

블레드 섬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성모마리아 승천 성당이었다. 안과 밖이 두루 수수한 성당의 내부에서 눈길을 끈 것은 ‘행복한 종’을 울릴 수 있는 기다란 줄이었다. 성당은 결혼식 장소로 애용되는데, 방금 식을 올린 신혼부부가 이 종을 치면서 영원한 사랑과 간절한 소원을 빈다고 한다. 결혼식장에 들어서기 전 신랑에게는 한 가지 ‘수행 과제’가 더 주어진다. 신부를 안은 채 성당 앞에 놓인 99개의 계단을 단번에 올라야 하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신랑의 힘자랑 통과의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블레드의 상징인 블레드 성은 호숫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자리했다. 성의 맨 위쪽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예배당이, 그 옆에는 블레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 위치했다. 블레드 성의 백미는 역시 지리적 이점에서 비롯된 활달한 전망이었다. 성에 오른 모든 사람들이 가장자리에 서서 빙하의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블레드 호수와 호수에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드리우는 블레드 섬을 굽어보았다. 호수에는 평화로움이 넘쳐났다. 정지 화면 같은 풍경 속에서 오직 플레트나만이 얕은 물이랑을 뒤로 끌면서 호면을 지나갔다. 성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와인 하우스에 들러 수도사가 직접 담근 와인을 시음했다. 시큼털털한 와인보다는 지하 저장고 같은 실내 분위기와 콧수염을 기른 수도사의 호탕한 웃음이 더 인상적이다.

슬로베니아의 전통 나룻배인 플레트나. 노를 젓는 일은 남자에게만 허락된다
슬로베니아의 전통 나룻배인 플레트나. 노를 젓는 일은 남자에게만 허락된다
이스트라 반도에서 가장 이름난 휴양도시인 피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드리아 해 북부에 있는 반도로, 해변 휴양지가 많은 곳이 바로 이스트라 반도다. 현재 이스트라 반도의 대부분은 크로아티아가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아드리아 해는 지중해를 향해 툭 불거져 나온 이탈리아 반도와 크로아티아가 위치한 발칸 반도 사이의 바다를 의미한다.

피란은 게으른 여행자들의 도시였다. 사람들은 숨이 넘어갈 듯한 휘모리장단 대신 진양조장단 같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일관했다. 피란에서 잰걸음이란 단어는 돋보기를 대고 살펴도 건져낼 수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타르티니 광장의 노천카페나 골목골목에 들어선 펍에서 이야기꽃으로 하루해를 지웠고, 어떤 이들은 매혹의 아드리아 해에 순백의 요트를 띄워 놓고 무위한 시간을 만끽했다. 그들은 모두 볕 좋은 계단에서 낮잠을 즐기는 고양이 같았다. 중천에 걸렸던 시뻘건 불덩이가 바다에 가까워질 무렵에 해안가를 찾았더니 이미 강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들은 물고기가 아니라 시간을 낚는 것처럼 보였다. 피란에 담긴 모든 순간들이 저속으로 재생되고 있는 듯했다.

피란의 타르티니 광장에서 열린 벼룩시장
피란의 타르티니 광장에서 열린 벼룩시장
피란에 머무는 동안 타르티니 광장에서 때마침 벼룩시장이 섰다. 피란의 벼룩시장은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긴요하게 쓰였을 온갖 중고품과 각양각색의 골동품, 이런저런 음식과 여러 가지 수공예품들의 경연장이었다. 도붓장수와 피란의 주민들이 차려 놓은 좌판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시절 만들어진 탁상시계를 15유로에 구입했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시계는 여기저기 녹이 슬었지만 태엽을 감아 밥을 주자 곧장 부활했다. 시침과 분침이 또각또각 움직였다.

음식을 파는 상인들은 피란의 이방인 가운데 거의 유일한 동양인인 내게 슬로베니아의 와인과 두툼한 훈제 고기, 그리고 갓 구운 빵을 맛보기로 거듭거듭 권했다. 시식이 아니라 거의 한 끼 식사에 가까웠다. 새콤한 와인은 산뜻했고, 훈연의 향이 살아 있는 고기는 쫄깃했으며, 유기농 빵은 보드라웠다. 그것은 음식 맛에 마음 맛이 더해진 결과였다. 한국의 장터에서나 느낄 법한 따사로운 인정이 감돌았다.

블레드·피란=글·사진 노중훈 여행작가

travel tip

호수 전망 호텔 강추

가는 길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들어간다. 프랑크푸르트~류블랴나 구간의 비행시간은 약 1시간15분. 류블랴나에서 블레드까지는 기차가 다닌다. 약 40분 소요. 유레일패스(www.eurailtravel.com/kr)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류블랴나에서 피란까지의 거리는 약 120㎞.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슬로베니아관광청 누리집(www.slovenia.info)에서 자세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날씨 지역에 따라 대륙성 기후와 지중해성 기후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알프스 지역은 여름에도 비교적 덜 덥고, 해안 지역은 겨울에도 비교적 덜 춥다. 5~9월이 여행하기 좋은 시기다.

숙박 블레드의 그랜드 호텔 토플리체(www.hotel-toplice.com)는 유서 깊은 호텔이다. 호수를 바라보는 전망이 빼어나다. 류블랴나의 센트럴 호텔(www.centralhotel.si)은 기차역에서 가깝다. 시내 관광의 중심인 프레셰르노브 광장도 지척이다. 아드리아 해를 안고 있는 피란과 인근의 포르토로주에는 크고 작은 호텔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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