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얼마 전 ‘아는 남자’가 변신했습니다. 퉁퉁하던 살집이 빠지고 부스스한 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되더니 옷차림이 아주 말쑥해졌습니다.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만년 고시생 같던 암울한 얼굴이 사라지고 단정해진 모습이 지나가면서 보기에도 상큼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그와 이야기를 하는데 셔츠 깃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새하얀 셔츠 깃 위쪽이 베이지색으로 얼룩져 있더군요. 저건 뭐지? 차마 묻지 못하고 궁리해보니 그건 바로 비비크림이었습니다. 왜 비비크림이 얼굴 아래 옷깃까지 묻어 있었을까요?
흔히 ‘가부키’ 화장이라고 핀잔받는 여성들의 흔한 실수를 피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과했던 겁니다. 얼굴에만 비비크림이나 파운데이션을 잔뜩 발라 얼굴과 목 부분의 색깔이 현저히 다를 때 어색한 무대화장이라고 해서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던 그의 센스가 지나쳐 발생한 사고였던 거죠.
차마 그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노력이 가상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듭니다. ‘남자가 말이야’라는 똥고집으로 너저분한 모습의 알리바이를 만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보다야 노력하는 모습이 좋지 않습니까?
마부가 말을 목욕시키고 빗질하는 데서 유래한 ‘그루밍’이라는 말은 이제 외모를 꾸미는 남성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형질변경돼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도통 가꾸는 것에는 관심 없어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자 선배가 백화점에서 비싼 화장품을 산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이래야 한다’는 보수성이 깨지는 것은 환영입니다. 다만 그루밍도 정도껏! 여자들만큼 예뻐진다는 데야 말릴 이유 없지만 여자들의 실수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김은형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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