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집을 구하려고 부동산중개업소를 돌아다니다 보면 중개업소 주인들로부터 듣는 ‘잠언’이 있습니다. “세상에 저평가된 집은 없다”는 것이죠. 같은 아파트 단지라도 1000만원 더 싼 집에는 빛이 덜 들어온다든가, 개보수가 안 됐다든가, 창문을 열면 자동차 소리가 밤새 들린다든가 하는, 조금 더 싼 이유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들은 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조용한 주택가의 깔끔한 집을 발견했답니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 월세가 싸기까지 했는데 그 집은 다름 아닌 점집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편견 없는’ 식자층(?)이었던 고로 “점집이 어때서? 다 사람 사는 집 아냐”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친구의 답변이 이랬습니다. “안 그래도 계약하려고 집을 보러 갔어. 그런데 방 하나를 죽어도 안 보여주는 거야. 문을 절대로 열지 않더라고.” 모두의 머릿속에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동시상영으로 지나가며 일순 조용해졌지요. 역시 저평가라는 건 없는 것인가 봅니다.
비단 집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를 보니 늘 어디선가 거저 받아오는 물건이라고 여겼던 수건에도 명품이 있나 봅니다. 빨아도 빨아도 빳빳해지지 않고 새것 그대로의 질감을 유지하는 수건이 있다는 게 신기하군요. 식지 않는 명품 논쟁처럼 이 값에 이 가치라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같은 기능의 물건 중 더 탐나는 건 어쩔 수 없이 더 비싼 제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다못해 초록색 돈(1만원권)보다 파랑색 돈(1000원권)을 더 좋아하는 아이조차, 고르는 장난감은 비싼 것뿐이더군요. 결국 방법은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버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그러면 월급명세서의, 저 기대 이하의 숫자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저평가는 정말 없는 걸까요?
김은형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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