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나의 첫 화장
1996년 가을 엠티 시즌, 몸담고 있던 테니스 동아리원들도 떠났다. 정취를 음미하고 사색에 잠기는 아름다운 시간은 결코 없었다. 007빵에 이어 당시 강남스타일만큼 인기를 끌었던 마카레나 댄스와 술판이 펼쳐졌다. 그러던 중 93, 94학번 누나들의 호출을 따라 나를 비롯해 1~2학년 사내들이 골방으로 끌려갔다. 여자 후배들은 음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뿔싸! 과거 동아리 선배들의 앨범을 보며 “ㅋㅋㅋ” 했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질 줄이야. 그렇다. 우리 사내들은 미스 ○○○라는 악습(?)에 따라 여장한 뒤 애교까지 부려야 했던 것이다. 나의 넓은 달표면 피부에 그들은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메이크업 베이스, 색조화장, 헤어코팅, 의상 스타일링으로 이어지는 대공사가 이뤄졌다. 그렇게 남자 2호인 난 별명인 감자를 모티브로 여신 ‘포테스트라’로 변했고, 누나들이 인정한 각선미를 무기로 경합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내 생애 미모로 순위권에 진입한 최초이자 마지막 순간. 여전히 동아리방에 가면 그때 모습을 앨범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김영일/서울시 송파구 거여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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